이름 : 황선홍
생년월일 : 1968년 7월 14일
신장 : 183cm  몸무게 : 79kg
별명 : 황새
포지션 : FW
등번호 : 18
출신교 및 클럽 : 용문고 - 건국대 - 포항 - 레버쿠젠AGER) -
부퍼탈(GER)  
포항 - 세레소(JPN) - 수원 
- 가시와(JPN) - 전남


스무 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대학교 2학년 때 황선홍이 속한 건국대가 대학축구연맹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1988년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A매치 첫 데뷔전은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 일본전. 데뷔전에서 멋진 헤딩골을 넣으며 화려한 A매치 신고식을 치렀다.

그 후 90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 개막 전 최대 다크호스로 평가받던 한국은 잇단 졸전으로 3전 전패의 수모를 당하며 예선탈락하고 만다. 하지만 한국은 황선홍이 있어 4년 후를 기약할 수 있었고, 이에 부응하듯 황선홍은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첫 번째 시련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건국대를 졸업한 황선홍은 홍명보와 함께 당시 드래프트를 거부. 독일로 축구유학을 떠난다. 그의 독일 첫 무대는 레버쿠젠 아마추어팀. 제2의 차범근을 목표로 도전한 독일무대에 도전을 시작했다.

첫 시즌 나름대로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그 다음해 2부리그 부퍼탈로 이적. 이적 후 불의의 부상을 당하며 힘든 독일생활을 정리하고 국내복귀를 결심. 결국 국내로 돌아와 93년 포항의 유니폼을 입게된다.

 
94 미국월드컵 시련의 시작.
93 최종예선 월드컵 예선에서 처음으로 일본에게 패하는 등 당시 아시아에 배정된 2장의 티켓을 따내기란 쉽지 않았다. ‘도하의 기적’으로 힘겹게 최종예선을 통과한 대표팀은 1994년 미국으로 향한다. 한국팀의 상대는 무적함대 스페인, 월드컵 예선 홈 경기에서 브라질을 격파한 볼리비아, 그리고 지난 대회 우승팀 독일. 어느 한 팀 만만한 팀이 없었다. 김호 감독의 1-4-4-1 전술에서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맡았던 그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 월드컵 한국팀의 1호 골의 주인공이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대표팀의 첫 상대였던 스페인. 전반 초반 스페인 수비수 나달의 퇴장으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으나 결과는 2:2 무승부. 한국팀으로선 선전한 경기였으나 황선홍 무득점에 그치고 만다. 이 경기에서 1:1 찬스를 놓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골을 넣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볼리비아전에 나서야만 했다. 결국 볼리비아 전에서도 잇단 실수로 경기 결과 0:0. 이날 승리를 하게되면 16강 진출을 90%이상 확정짓는 상황이어서 더욱 아쉬웠고. 그 경기에서 많은 실수를 범한 황선홍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야 말았다.

 16강 진출을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인 독일과의 경기에서 0:3으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 첫 골을 뽑아냈으나 팀은 2:3으로 패. 결국 16강을 다음 대회로 미뤄야만 했다. 대표팀의 선전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황선홍은 온갖 비난에 시달리며 그의 시련은 계속되고 있었다.

                            월드컵 독일과의 경기에서 득점장면.

 

 부활. 그러나 그를 붙잡는 부상으로 또다시 좌절...
월드컵이 끝난 후 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의 맹활약, K리그 8경기 연속골 등 미친 듯이 골을 넣으며 다시 황선홍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당시의 황선홍은 유고(現세르비아 몬테네그로)용병 라데 보그다노비치와 함께 완벽한 호흡으로 상대편 골문을 유린, 전 구단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황선홍-라데 라인은 K리그 역대 최고의 투톱으로 평가받고 있다.)

 황선홍의 폭넓은 움직임과 라데의 파괴력 있는 돌파와 결정력이 휼륭한 조화를 이루며 다시 한번 골게터로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시켰다. 하지만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부상과 그에 대한 편견은 여전했다.

96 아시안컵 이후 부상으로 신음하며 K리그와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97년 1월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 없는 대표팀을 이끌어야 했다. 그의 부상회복만을 기다렸으나 황선홍은 결국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 단 한 경기도 참가하지 못하고 만다.

 98년 3월 다시 대표팀에 복귀한 황선홍은 4월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감각적인 시저스 킥으로 극적인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프랑스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또 유럽의 강호 체코와의 경기에서 맹활약. 황선홍-최용수 투톱은 합격점을 받았고, 월드컵 16강은 더 이상 꿈이 아닌 듯 했다. 하지만 프랑스 출국직전 가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상대팀 골키퍼와의 충돌로 인해 또다시 부상.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팀의 패배와 사상초유의 월드컵본선 현지에서의 감독경질을 바라만 봐야했다.


                        98년 일본 평가전에서의 득점장면.

 

갑작스런 해외진출. 그 무대는 일본.


 
황선홍이 아무리 골을 넣어도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황선홍 자신도 뭔가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껴 선택한 것이 일본행.(어쩌면 일본을 상대로 많은 골을 넣어 자신을 인정해주는 일본 프로리그에서 뛰었는지도 모른다.) 
 

98 프랑스 월드컵이 끝나고 J리그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 99년 J리그에서 24골을 기록.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성공적인 일본생활을 해 나갔다. J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건 J리그의 수비가 느슨해서 득점하기 쉬웠다고 펌하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다음해 수원과 전남이 황선홍 영입에 나섰고 국내 복귀를 결심해 2000년 수원 유니폼을 입는다. 하지만 그가 뛴 경기는 한 경기. 곧바로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했던 샤샤와 트레이드형식 임대로 가시와 레이솔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그곳에서 홍명보, 유상철과 함께 다시 H-Y-H 라인을 가동하며 가시와 레이솔을 상위권으로 이끌었다.

 마지막 무대를 위하여.
J리그와 대표팀을 오가며 맹활약하던 황선홍은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직전 합류. 1년 2개월만에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다. 한국은 프랑스에게 0:5로 패하며 조별예선통과에 실패했지만 황선홍은 멕시코, 호주전에서 골을 기록하며 브론즈슈(득점3위)를 수상.‘대표팀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황선홍’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후 J리그와 대표팀에서 꾸준한 활약을 보였고, 히딩크의 감독 파워프로그램도 젊은 선수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충실히 수행해내며 월드컵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최종엔트리에 자신의 이름은 당당히 올린 황선홍은 월드컵 개막직전 '월드컵 종료 후 대표팀 은퇴'를 선언. 많은 사람들이 그의 대표팀 은퇴를 아쉬워했다.

 2002 월드컵. 한국팀의 첫 경기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이을룡(30.트라브존)의 어시스트를 받아 선제골을 뽑아내며 팀은 2:0승. 월드컵 첫승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는 상대팀 수비수와 충돌하며 눈썹 윗부분이 찢어지고 말았고, 붕대를 감은상태에서 다시 경기장에 들어서는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2승1무의 예선 성적으로 16강에 진출.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A 메치 100경기 출장을 달성과 함께 설기현(26. 울버햄튼)의 극적인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한국팀이 월드컵에 4강에 진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황선홍은 그간 자신을 항상 따라다니던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명예롭게 대표팀에서 은퇴할 수 있었다.(그 해 11월 브라질과의 A매치로 황선홍과 홍명보의 은퇴경기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던 시련...
월드컵 기간동안 진통제를 맞아가며 경기에 출장한 탓에 황선홍은 또다시 부상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소속팀 가시와 레이솔은 이미 홍명보의 포항복귀와 유상철의 유럽진출 선언으로 전력약화를 가져오며 가시와의 순위는 점점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결국 가시와는 황선홍의 부상복귀를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방출을 결정. 한동안 무적상태로 새로 뛸 팀을 알아보기도 했다. 터키에서 영입제의가 들어왔으나 계약기간 1년 이상을 제시한 트라브존과 6개월을 주장한 황선홍은 결국 계약협상 결렬. 그 후 전남에 입단했으나 그의 부상은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선수로서 은퇴. 지도자의 길로 그의 새로운 축구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도 대표팀 경기에서 골대 위를 훌쩍 넘기는 슈팅을 날릴 때면 생각나는 이름이 있다. '황선홍' 1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했고, 미국 월드컵 당시 나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이 나라 대표팀의 스트라이커로 살 수 있어 행복했었다고......




Posted by 공차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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