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이야기

1997 U-20 청소년대표. 원조 황금세대 그 화려한 시작과 몰락.

공차는아이 2011. 2. 1. 22:29

2년전 선배들이 일본 청소년 대표팀에게 0:1로 패하며 세계대회 진출에 실패한 후 결성된 청소년 대표팀. 대학, 고교 최고의 선수들로 선발하며 역대 최강의 전력이라 불리었다. (당시 유일한 프로선수였던 고종수는 감독과의 불화로 탈락)

 

1996년 10월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청소년 대표팀은 세계대회 출전티켓 확보는 물론, 안방에서 벌어지는 대회인 만큼 반드시 우승을 차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예선에서부터 승승장구하던 경기력에서도 역대 U-19팀을 초월한 능력들을 보였고, 또다시 준결승에서 나카무라, 미야모토가 이끄는 일본을 만나게 된다. 최종 스코어는 1:0이었지만 당시 일본을 농락한 수준이었다. 그 후 결승에서 리진위, 리티에가 이끌던 중국대표팀을 3:0으로 완파하고 우승을 차지. 당당히 아시아 챔피언으로 세계대회를 준비하게 된다. 출국전 1995 U-20 세계대회 우승팀 당시 리켈메, 아이마르, 사무엘, 캄비아소, 로메오등이 맹활약하던 아르헨티나를 초청해 평가전을 치뤘고,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기대에 부풀게 했다.(아르헨티나는 1997년 U-20 월드유스마저 석권)

 

남아공 - 프랑스 - 브라질. 97년 말레이시아 쿠칭에서 벌어지는 세계대회 한국팀의 조편성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브라질을 제외한 남아공은 대회 최 약체로 분류했고,  90, 94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프랑스를 잡겠다며 4강행을 자신했다.


1차전 VS 남아공

경기전 언론에서는 당시 아약스에서 뛰고있던 베니 멕카시만 주의하면 된다며 승리를 장담했다. 경기 내용 또한 남아공을 압도하며 승리를 이끌어내는 듯 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공 골키퍼 제이슨 로버츠의 눈부신 선방에 막히며 득점을 올리지 못하고, 결국 0:0 무승부를 기록하고 만다.


2차전 VS 프랑스

1차전에서의 승리가 당연할거라 생각했던 한국은 의외의 무승부를 기록했고, 프랑스를 반드시 잡아야만 16강에 오를 수 있었다. 각 언론에서는 프랑스에 뛰어난 스트라이커가 있다며 그 선수를 주의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 주인공은 현재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불리우고 있는 티에리 앙리(30. 바르셀로나) 장신 스트라이커 앙리를 봉쇄할 방법이 있다던 한국은 대표팀 주장 김도균을 앙리 전담 마크맨으로 기용했다. 하지만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김도균은 폭발적인 스피드를 지닌 앙리를 막아내지 못해 두 골을 허용했고, 트레제게에게도 두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4:0으로 벌어진 상황에서 박진섭(30. 성남)이 골을 넣으며 따라갔으나 결과는 2:4의 완패. 당시 언론에서 평가한 약체 프랑스의 선수들은 현재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되어 있다.



3차전 VS 브라질

조 최강팀이었던 브라질. 브라질도 그리 높은 벽이 아니라며 승리의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이 경기가 그 후 쿠칭 쇼크로 불리우게된 10:3 경기다. 한국은 첫 골을 실점하기 전 까지 브라질과 대등한 경기를 펼쳐 나갔으나 페르난다오에게 첫 골 실점 후 브라질 주 공격수 아다일톤에게 연속골을 허용하며 점수는 6:0으로 벌어졌고, 한국은 이관우, 정석근, 이정민이 골을 기록했으나 최종 스코어는 10:3 완패를 당하고 만다. 이 경기에서 아다일톤은 한 경기 6골을 기록했으며, 대회 득점왕까지 차지한다.

 

청소년 대표팀은 1무2패의 성적을 기록하고, 한국으로 돌왔고, 곧바로 해산됐다. 그 후 그들은 U-23 대표팀과 A팀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말았고, 아시아 최종예선 엔트리에 포함됐던 김남일, 이동국과 달리 본선에 출전한 선수들 중 월드컵 무대를 밟아 본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


주요선수들.


정유석(30.부산) - 아주대 소속의 골키퍼였던 정유석은 당시 U-20팀의 주전 골키퍼였으나 예선전부터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본선에서도 판단미스와 수비진의 붕괴로 많은 실점을 기록하였다. 아주대 졸업 후 부산에 입단하였고, U-23 대표팀에도 잠시 이름을 올렸으나 거제고 2년 후배 김용대(28.성남)의 등장으로 그 후 대표팀에서 정유석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군제대와 김용대의 성남 이적으로 현재 부산 아이콘스 주전 GK로 활약.


최현(29.제주) - 당시에도 NO.2 골리였던 최현. 주전 GK였던 정유석의 존재로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중앙대 재학당시 U-23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 이번엔 김용대라는 또 하나의 벽에 막혀 백업멤버로 올림픽에 참가한다. 졸업 후 부천에 입단하였고, 입단 초 주전 GK이용발의 백업으로 활약하였으나 이용발의 전북 이적으로 한동진과 주전 GK를 다퉜으나 조준호의 등장으로 다시 백업GK로 밀린상황.


심재원(30.부산) - 주전 수비수였던 심재원. U-20 수비수중 안정적인 활약을 펼쳤던 선수. 그 후 U-23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렸고, 아시아 예선에서 올림픽 본선까지 참가하며 U-23 주전수비수로 맹활약했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부산에 입단하였고, 부산 입단 후에도 주전을 꿰차며 당당히 A팀에도 이름을 올린다. 아시안컵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관심을 받게 되었고, 당시 2부였지만 프랑크푸르트로 임대되어 뛸 수 있었다. 심재원은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에도 꾸준히 A팀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으나 끝내 월드컵 무대는 밟아보지 못하고 만다. 유럽무대를 정리하고 부산으로 복귀했으나 좀처럼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상무 입대 후 자신의 기량을 조금씩 되찾아가 현재 부산의 핵심선수로 활약중이다. 2006월드컵 당시 아드보카트감독이 잠시 심재원에게 관심을 갖는 듯 했으나 어느새 노장축에 속하는 심재원이 다시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


박진섭(30.성남) - 97청대당시 스위퍼를 보던 박진섭. 공격가담으로 프랑스전에선 득점까지 기록했다. 그 후 다른 동기생들과 마찬가지로 U-23대표팀에 합류. 하지만 스위퍼가 아닌 오른쪽 윙백으로서 포지션을 변경했고, U-23대표팀의 핵심멤버로 꼽히기 시작한다. 매 경기 느린 듯 하지만 안정적인 플레이와 공격포인트를 올리면서 감독과 팬 모두에게 사랑받는 선수가 되었다.

99년 코리아컵에서는 김도균, 이영표와 함께 A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77년생 동기들이 프로 드래프트를 참가했지만 박진섭은 유럽행을 염두하는 듯 곧바로 상무 입대를 결심하게 된다. 상무에 입대하고, 올림픽 본선에서도 좋은 플레이를 펼쳤으나 2승1패를 기록하고도 예선 탈락의 아픔을 맞는다. 올림픽대표팀에서 좋은 활약을 바탕으로 대표팀 시절 유럽에서 입단제의가 있었지만 상무에 입대한 후 히딩크 감독에게 외면당하면서 자신이 목표로 했던 유럽진출을 이루지 못했고, 제대 후 울산에 입단하게 되었다. 울산 입단 후 K리그 최고의 오른쪽 윙백으로 활약하며 본프레레감독이 이끄는 아시안컵 대표팀에 합류했지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해 그 후 대표팀과는 거리가 멀어진 상태. 현재 K리그 최강팀 성남으로 이적해 맹활약중이다.


조세권(29.전남) - 청대시절 심재원, 한종성과 함께 한국팀의 수비를 이끌며 주목받기 시작해 98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선발된다. 평가전에서 중국대표팀 스트라이커 하오하이동을 완벽하게 봉쇄하였고, 허정무감독 눈에 들어 올림픽 대표팀에 승선한다.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나 계속되는 부상과 박재홍이 두각을 나타내며 올림픽대표팀 당시 후보로 밀리고 만다. 대학 졸업 후 드래프트를 신청해 1라운드로 울산에 입단하였으나 계속되는 부상으로 2라운드로 울산에 지명된 서덕규에게 한동안 주전을 빼앗겼고, 대표팀과의 인연도 점점 멀어졌다. 재활 후 울산의 주전수비수로 활약하는동안 국가대표로 선발될 기회에도 매번 부상으로 주저앉고 말았고, 현재 전남으로 이적하였으나 주전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


박준홍(30.부산교통공사) - 청소년대표 주전 DF였던 박준홍. 연세대 졸업 후 2라운드에 부산에 지명되며 프로생활을 시작했지만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며, 현재 내셔널리그 부산교통공사에서 활약중이다.


남기성(30.수원시청) - 청소년대회 참가 후 한양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한동안 대표팀 부름을 받지 못하던 남기성. 허정무 감독이 유럽전지훈련에 남기성을 선발하였고, 그 후 최종예선 중국과의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수원에 입단 후 주전자리를 꿰차지못하며 방출되었고, 현재 수원시청에서 뛰고 있다.


한종성(30.- ) - 청소년대표팀 이후 태극마크와 인연이 없었던 한종성. 2002년 전북에 입단하면서 프로생활을 시작하였고, 전북에서 한동안 주전자리를 꿰차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두시즌만에 주전자리를 내줘야했고, 그 후 전남으로 이적하였으나 많은 경기를 뛰지 못하고, 은퇴를 한 상황이다.


서기복(28.인천) - 97청대 주전 플레이메이커였던 서기복. 두 살 많은 형들속에서 당당히 주전자리를 꿰찼다. 96아시아 대회에서도 최고의 플레메이킹을 보이며 맹활약했고, 세계대회에서도 대한민국의 허리를 책임졌다. 대학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였던 서기복은 99년 U-23대표팀에 잠시 이름을 올렸으나, 최종예선에도 기용되지 않았고, 본선 엔트리에도 합류할 수 없었다. 2001년 대학 졸업 후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하게 된다. 상무 입대 후에도 좋은 활약을 펼쳤고, 군 제대 후 K리그에도 자유계약제도가 도입되어 전북과 계약을 체결하고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전북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인천으로 이적하였으나,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주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양현정(30.can sai gon) - 청소년 대표 시절 측면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당시 차범근 감독이 A팀에 호출할 정도로 촉망받는 선수였다. 올림픽 대표팀에서는 잠시 이름을 올렸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다른 동기생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 단국대 졸업 후 1라운드 다섯 번째로 전북에 지명되어 프로생활을 시작하였고, 올림픽대표팀에서 맹활약하던 이영표, 이관우, 김남일등을 제치고 당당히 신인왕을 차지한다. 그 후 당시 세리에B 소속의 토리노가 관심을 갖는등 주목받는 프로생활을 하였으나 군에 입대한 후 부상으로 의가사제대를 하면서 대구로 이적. 현재 국내가 아닌 베트남 프로리그에서 활약중이다.


김도균(30. - ) - U20 대표팀의 맡형 김도균. 팀의 주장으로서 중앙에서 안정적인 플레이를 펼치며 대표팀의 미래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U-20세계대회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감독의 지시로 티에리 앙리를 전담마크 하였으나 두 골을 허용하였다. 한 학년 위였던 김도균은 1999년 울산대를 졸업하고, 연고지명으로 울산 현대에 입단하게 된다. 입단 초기 주전으로 활약하며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였고, 대한축구협회 유망주 프로젝트로 독일 분데스리가 한자로스톡 입단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 대표팀과의 인연이 멀어졌고, 2004년 교토 퍼플상가로 이적하였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국내 복귀. 전남으로 이적하였으나 최근 은퇴하였다.



이관우(29.수원) - 97 U-20 대표팀의 에이스 스트라이커. 이관우의 존재로 인해 당시 대표팀은 역대 최강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재능은 남달랐다. 하지만 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하고 난 후 모든 비난의 화살은 이관우에게 돌아갔고, 어린 나이의 이관우로선 감당하기 힘든 일 이었다. 그로 인해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고, 계속된 부상에 시달려야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가 아닌 공격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한 이관우는 꾸준히 올림픽대표팀에 이름을 올렸고, 그 후 좋은 활약을 펼치며,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지만 부상이 그의 발목을 붙잡으며 올림픽 본선에는 나서지 못했다. 2000년  J리그 아비스파 후쿠오카로 이적을 결심하였으나 이미 프로 드래프트를 신청한 상황이어서 1라운드 2위로 대전에 지명되어 프로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대전의 핵심선수로 활약하며 약체 대전을 F.A컵 우승으로 이끌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난히 대표팀과 인연이 없던 이관우는 미드필더를 중시하던 코엘류 사단에 선발되어 대표팀의 10번을 차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코엘류감독 사퇴 이후 더 이상 대표팀 명단에 이관우의 이름은 볼 수 없었다. 2006년 대전에서 K리그 강호 수원으로 전격 이적. 현재 수원의 주장으로 수원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으며, U-20 동기생들중 가장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박병주(30. 수원시청) - 문일고 - 한성대를 졸업하며 촉망받는 선수였던 박병주. 측면에서 빠른 발을 이용한 플레이가 인상적이었던 박병주는 한성대를 졸업한 후 K리그 드래프트가 아닌 경찰청에 입대해 군 복무를 해결한 후 대구 FC에 입단한다. 하지만 대구에서 주전경쟁에 밀리면서 방출당하고 말았고, 현재 수원시청에서 활약중이다.


안효연(29. 수원) - U-20 시절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던 안효연. 부평고시절부터 주목받던 안효연은 동국대시절 대학무대를 평정하였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대표팀에서도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최종 예선에서도 활약하였지만 같은 포지션의 설기현과 측면 윙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한 신병호에게 조금씩 밀리면서 시작했다. 예선이 끝나고 올림픽 본선에서는 3-4-3이 아닌 3-5-2전술로 변경한 허정무 사단에서도 안효연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그래도 폭발적인 스피드와 드리블 능력을 갖고 있던 안효연은 대학 졸업 후 K리그 드래프트 1순위가 확실시 되었고, K리그 모든 구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안효연은 K리그가 아닌 일본 J2리그 교토 퍼플상가를 선택. 일본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하며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어 대표팀으로 중동전지훈련에 참가하였고, 득점까지 기록하면서 월드컵 출전에 기대를 품었지만 또다시 설기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국내로 돌아와 수원에 입단해 활약을 하다 성남으로 이적하였고, 현재 수원으로 임대되어 활약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