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이야기

프로 1세대 2000년 U-19 청소년 대표. 하지만 세계의 문을 두드리지 못하다.

공차는아이 2011. 2. 1. 22:32

고종수, 이동국, 김은중의 영향으로 대학을 거치지 않고, 프로로 진출하는 선수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1999년 광양제철고의 김경일이 억대 계약금을 받으며 전남에 입단하자 고교에서 프로로 직행하는 선수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1999년 결성된 청소년 대표팀은 방가반두컵등 여러 대회에 참가하며 조직력을 완성시키기 시작하였고, 2000년 1월 일본 신년 4개국 청소년대회에서 강호 파라과이와 이탈리아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대표팀 주축 이천수, 최태욱, 박지성은 이미 U-23올림픽대표팀으로 월반하여 올림픽 본선에 참가하여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2000년 11월 U-19아시아선수권대회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였다.

 

하지만 본선 첫 경기 중국과의 경기에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골게터 취보(28.칭다오)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0:1패배를 당하고 만다. 첫 경기에서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대표팀은 2차전에서 파키스탄을 7:0으로 대파하며 1차전의 부진을 말끔히 씻어냈고, 3차전에서도 UAE를 4:2로 격파하고 희망을 이어갔다. 하지만 같은조의 이라크와 중국이 승승장구 하면서 조3위를 기록하고 있어 예선 마지막 상대인 이라크를 무조건 이겨야만 예선 통과를 바라볼 수 있었다.

 

2000년 11월 19일 이라크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 대회 최강팀으로 평가받는 한국이었기 때문에 이라크는 수비에 중점을 두며 경기를 이어 나갔고, 한국팀은 그런 이라크 수비를 뚫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대회 3연패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한국을 제치고 예선을 통과한 이라크는 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 또한 2001년 아르헨티나 세계대회에 참가하여 16강에 오르는등 좋은 활약을 펼쳐 대한민국 U-19 대표팀으로선 더욱 아쉬움이 남는 대회로 남고 말았다. 대회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박지성,이천수,최태욱은 2002 월드컵 주역으로 활약하였고, 출전 선수중 상당수는 2004 아테네 올림픽대표팀에 선발되며 대표팀 경력을 이어나갔고, A팀에도 선발되는등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대표팀 선수들.

 - GK -

 

                                         

박동석(28.서울) - 1997년 정유석(32.부산), 1999년 김용대(30.성남)에 이어 거제고에서 3대회 연속으로 주전 GK를 배출했다. 그 이름은 거제고를 졸업하고 아주대에 입학한 박동석. 1999년 청소년 대표팀이 구성될 당시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던 박동석은 2000년 일본 신년대회 파라과이 전에서 눈부신 선방을 펼치며 주목 받았고, 주전 GK로서 김지혁, 김영광보다 한 수 앞선 신력을 보여줬다. 아주대 중퇴 후 2002년 안양에 입단한 박동석은 신의손의 백업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신의손 은퇴 이후 주전 GK는 박동석의 몫이라 생각했으나 포항에서 김병지(39.경남)가 이적해오면서 주전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고, 결국 상무에 입대해 기회를 노렸다. 2007시즌 과거보다 많은 경기를 뛰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009년 제대 후 팀에 복귀한 박동석은 김병지가 떠나고 공석이 된 주전 GK 자리를 김호준과 잠시나마 경쟁을 하였지만 또다시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말아 현재 김호준의 백업 골키퍼로 활약중이다.

  

김지혁(28.포항) - 박동석의 백업 골키퍼. 고교 졸업 후 아주대를 선택한 박동석과 달리 2000년 경남상고 졸업 후 부산으로 프로 직행. 주전 골키퍼로 뛰기엔 어린 나이였고, 당시 부산에는 주전 GK정유석이 활약하고 있었다.

 

2000년 U-19 아시아 선수권대회 당시 박동석의 벽을 넘지 못했고, 두 살 어린 김영광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대표팀내에서도 입지가 불안했다. 대표팀의 입지와는 달리 부산구단에서는 김지혁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고, 미래의 주전 GK로 육성하기 위해 자매구단이었던 헤렌벤연수를 보내는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정유석과 2002년 입단한 김용대(30.성남)로 인해 다시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고, 2005년 울산으로 이적을 결심하게 된다. 울산에는 서동명이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었고, 다른 경쟁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울산 이적 후 서동명대신 챔피언결정전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후 2006 시즌부터 주전자리를 꿰찼지만 전남에서 김영광이 이적해오면서 다시 주전에서 밀려 2008년 포항으로 이적. 신화용과 다시 경쟁을 펼쳤지만 현재 주전경쟁에서 밀린 상태다.

 

 김영광(26.울산) - 2000년 U-19 청소년대표팀 선발 당시 제3의 골리. 이미 U-16대표시절부터 기량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1~2년 선배들을 제치고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될 수 있었다.

 

당시엔 벤치멤버였지만 2002년 U-19 당시 염동균(26.전남)과 성경일(25.광주)을 제치고 주전 GK로 활약했고, U.A.E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02년 전남 입단 후 당시 주전 GK박종우의 백업으로 활약하다 2003년부터 전남의 주전 GK로 활약했고,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 그 해 A매치에 데뷔하기도 했다.

 

공중볼에 약하고, 골키퍼로선 어린 나이다보니 안정감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엔 거칠것이 없었고, 대표팀에서도 이운재(36.수원)을 위협할 유일한 선수로 평가받으며 2006 독일 월드컵 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하지만 상무 제대 후 돌아온 염동균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전남에서의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고, 2007년 이적을 결심. 울산으로 이적하여 활약중이다.

 

- DF -

박용호(28.서울) - 2000 U-19 주전수비수. 조병국(28.성남)과 수비라인을 구축하며 좋은 플레이를 펼쳤고, 2004아네테 올림픽에서도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으며 A매치에 데뷔하게된다.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활약으로 한국대표팀의 미래로 평가 받았지만 소속팀에서 주전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며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2005시즌 군에 입대해 광주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두 시즌동안 광주에서 활약한 후 팀으로 복귀했으나 당시 이적한 김진규와 입대전 박용호와 주전 경쟁을 다투던 김치곤의 존재로 인해 출장에 어려움이 따랐다. 지금은 준 주전급로 활약하며, 김진규와 김치곤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조병국(28.성남) - 당시 수비라인의 핵심. 강력한 피지컬을 앞세운 맨마킹으로 상대팀 공격수를 무력화시켰다. 청소년대표 시절에도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2001년 12월 골드컵을 앞으로 대표팀에 선발되는 기쁨을 맞기도 했다. 비록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대표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고, 2002년 연세대를 중퇴하고 수원에 입단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2002년 구성된 아시안게임대표에도 선발되었고, 올림픽대표팀에서도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을 6전 6전승 무실점으로 본선진출 시키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물론 A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해나갔다. 하지만 올림픽 본선을 앞두고 당한 부상으로 인해 올림픽 본선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 후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소속팀에서의 입지도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수원은 김남일(32.고베)의 영입을 위해 고종수와 함께 조병국을 전남에 보내는 트레이드하면서 수원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 해 조병국은 다시 성남으로 현금트레이드 되었고, 이적 초기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실망스러운 경기 내용을 보여줬으나 김학범 감독의 신임으로 경기에 출전하며 감각을 익히면서 좋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성남의 막강 포백라인의 한 축으로 성장한 조병국이었지만 그 후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잠시 대표팀에 선발된 적은 있지만 부상으로 인해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고, 그 후 대표팀 감독들은 수비 능력은 좋으나 공격 전개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대표팀에서 선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병규(27.광주) - 임유환(26.전북)과 함께 제2의 홍명보로 불리우던 박병규. 당시엔 임유환보다는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았고, 부평고 3학년때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되어 아시아청소년대회 당시 주전으로 활약했다.

 

고교 졸업 후 연고 구단이었던 안양과 고려대에서 박병규를 스카우트 하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고, J리그 교토 퍼플 상가까지 러브콜을 보냈다. 박병규가 고교 졸업 후 선택한 곳은 고려대. 교려대에서 4년간 활약하며 대학 최고의 수비수로 인정 받았다.

 

하지만 일찍 프로행을 선택한 선,후배들이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는 동안 대학무대에서 활약하던 박병규는 조금씩 잊혀지기 시작했고, 2000 U-19 대표팀 멤버들이 주축을 이룬 올림픽대표팀에도 출범 초기 선발됐을 뿐 그 후 박병규란 이름을 대표팀 명단에서 볼 수 없었다. 대표팀과 인연은 없었지만 고려대 졸업 후 울산에 입단하자마자 주전으로 활약하며 성공적인 프로생활을 시작했고, 올 해 광주에 입대한 이후에도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다. 

 

 

임유환(26.전북) - 또다른 제2의 홍명보. 당시 U-19 멤버들은 1981~2년생이 주축으로 된 대표팀이었기 때문에 당시 광양제철고 2학년이었던 임유환과 김영광의 선발은 그들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다는 이야기다.

 

임유환은 당시 선배들에 밀려 많은 시간을 출장하지 못했지만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2년 후 대회에서는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며 대회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2001년 김영광,장경진과 함께 광양제철고를 전국 최강의 팀으로 이끈 임유환은 이들과 함께 전남에 입단할 것이 유력했으나 축구명문 한양대에 입학을 결정하면서 프로행을 잠시 미루게 됐다.

 

한양대에 입학한 이후에도 전남과 J리그에서는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고, 2002년 U-19대회 우승을 이끈 후 프로행을 결심하게 된다. 그의 첫 프로무대는 J리그. J리그 입단 초기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부상으로 주전자리를 뺏긴 후 한동안 출전하기가 힘이 들었고, 벤치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2003년 U.A.E U-20 세계대회에도 임유환은 2002년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많은 실책과 무리한 롱패스 남발로 인해 팬들로부터 많은 질책을 받았다.

 

소속팀은 2부리그로 추락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올림픽 대표팀 최종엔트리에도 탈락하면서 결국 국내 복귀를 결심하게 되었고 전북에 입단하게 된다. 하지만 국내로 돌아왔지만 J리그 스타일로 경기를 펼치다보니 K리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주전경쟁에서 또다시 밀리고 말았다. 2007년 울산으로 트레이드 됐으나 그 해 다시 전북으로 돌아올 정도로 리그내에서 불안한 입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2008 시즌이 시작되면서 임유환은 예전의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하기 시작했고, 중앙수비수, 수비형 미드필더로 맹활약하면서 국가대표에 선발되기도 했다. 2009시즌에도 좋은 활약을 펼치며 전북을 리그 1위로 올려놓는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청소년대표 시절 불리던 제2의 홍명보란 수식은 더 이상 붙질 않는다.

 

 신동근(28.성남) - 동기생들과 달리 세계무대를 경험했던 유일한 선수. 1999년 U-20 세계대회에서 유일한 고교생으로 선발되어 3차전 말리와의 경기에 투입되었고, 2000년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도 많은 기대를 받은 기대주. 청구고 졸업 후 연세대에 입학한 신동근은 탁월한 기량과 좌우 플백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하며 대표팀의 주전으로 활약했다. 박지성, 이천수, 최태욱만큼의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했지만 2001년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A팀에 합류하면서 이영표(32.알히랄)와 송종국(31.수원)을 이을 기대주로 평가 받았다.

 

대학무대에서 신동근의 적수는 없었고, 2003년 프로진출을 선언하고 성남에 입단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성남에 입단 후 바로 주전을 꿰찰 수 있는 선수라는 평가를 내렸지만 성남 입단 이후 부상으로 2군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재활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소속팀에 복귀했지만  이기형, 박충균같은 베테랑과 국가대표 출신 풀백 박진섭, 연습생 출신 장학영이 신동근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많은 출장시간을 부여받지 못했고, 큰 부상으로 오랜기간 그라운드를 누비지 못하면서 예전만큼의 기량이 나오질 않았다. 2007년 상무에 입대해 두 시즌을 보내고 2009년에 성남으로 복귀했지만 주전확보는 아직 미지수.

 

김동진(27.제니트) - 안양공고 졸업 후 2000년 안양에 입단해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했지만 동기생들만큼 많은 주먹을 받지 못했다. 대표팀에서도 좌측 풀백, 중앙수비수, 수비형 미드필더등 확실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러 위치를 옮기며 뛰기 시작했다.

 

청소년대표시절보다는 올림픽대표팀으로 올라가면서부터 주 포지션인 왼쪽 풀백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이영표의 대체자는 더 이상 신동근이 아닌 김동진이었다. 올림픽 본선에서 득점도 기록하고, 정확한 크로스로 어시스트를 까지 기록하며 올림픽기간동안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소속팀에서도 왼쪽풀백 주전으로 활약했고, 대표팀에서도 이영표의 백업이었지만 왼쪽 풀백이외에도 중앙수비수도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급성장. 2006월드컵대표로 선발되어 프랑스와 스위스 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월드컵이 끝나고 아드보카트감독과 함께 제니트에 입단하면서 러시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생활하면서 대표팀 주축 선수로 성장하였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남아공 월드컵에서 왼쪽 풀백의 자리는 김동진이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 MF -


박지성(28.맨유) - 청소년 대표팀보다 올림픽 대표팀에 먼저 선발된 특이한 케이스. 박지성과 같은 경우는 전무후무한 경우일 것이다. 초등학교시절 차범근축구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망주였으나 중고교시절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하고 수원공고 은사의 도움으로 1999년 명지대에 입학하게 된다. 명지대와 올림픽대표팀간의 연습경기에서 허정무감독의 눈에 띄어 올림픽대표팀에 선발되었고, 오른쪽 풀백으로 활약하면서 조금씩 입지를 다져나갔다.

 

올림픽대표시절 J리그팀들로부터 관심을 받아온 박지성은 명지대를 중퇴하고 교토 퍼플 상가에 입단하게 되었고, 올림픽 본선에도 출전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U-23에 선발되어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당시 스포트라이트는 1년 후배 이천수, 최태욱이 받고 있었다. 올림픽팀이 해산하고, 아시안컵에 참가한 후 곧바로 청소년대회에 참가하는 강행군으로 박지성의 몸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결국 팀의 예선탈락을 막지 못했고, 박지성은 U-20 세계대회 경험 기회를 놓치고 만다. 대회가 끝난 후 교토로 돌아간 박지성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줬고,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 꾸준히 대표팀에 선발되면서 2002년 월드컵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는등 대표팀 주역으로 급성장하게된다.

 

2003년 교토와의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박지성은 히딩크의 러브콜을 받고 PSV 아인트호벤에 입단하게 된다. 그 곳에서 팀을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올려놓으면서 유럽 명문구단의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결국 맨유에 입단하게된다. 맨유 입단 후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했지만 팀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평가받았고, 대표팀에서는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2006년 월드컵에 참가하기도 했다. 현재 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으며,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팀의 주장이자 에이스로 맹활약 할 것으로 예상.

 

김정우(27.광주) - 부평고 시절부터 대형 미드필더로 각광받은 유망주. 청소년 대표팀 당시한 살 많은 최원권(28.광주), 전재운(28.제주) 같은 좋은 미드필더들이 많았지만 전혀 뒤지지 않는 좋은 활약을 펼쳤다. 고려대 3학년때 프로진출을 결심하고 2003년 K리그 강팀 울산에 입단하게 된다. 청소년대표 이후 구성된 U-23 올림픽 대표팀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주전자리를 꿰찼고, 올림픽 본선에서도 득점을 기록하는 등 8강 진출에 일등공신 이었다. 

2005시즌 울산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이후 대학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온 J리그 나고야에서 이적제의를 해오면서 2006년 J리그로 진출하게 되었다. 유럽선수들과 몸싸움에 약점을 보이던 김정우로선 J리그가 어울리는 리그였는지 좋은 활약을 펼쳤고, A팀의 김남일(32.고베), 이호(25.성남), 김상식(33.전북)등과 함께 주전경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2006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월드컵이 끝난 K리그 성남으로 돌아와 주전으로 활약. A팀에서도 노장 김남일과 김상식이 대표팀과 멀어지면서 김정우에게 꾸준히 기회가 왔고 현재 A팀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2010시즌 광주상무에서 활약하기 위해 군입대 준비중이다.

 

 

최원권(28.광주) - 동북고 시절 고교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불리웠던 최원권. 1999년 방가반두컵에서도 재치 있는 플레이를 보여줬고, 2000년 안양 입단 후 U-19대회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대회가 끝나고 소속팀으로 복귀했지만 당시 안양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던 안드레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 조광래 감독의 권유로 윙백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윙백으로 출전하면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U-23팀에서도 중앙 플레이메이커가 아닌 오른쪽 윙백으로서 박규선과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주축 선수들중 상당수가 A팀에 이름을 올렸지만 최원권은 대표팀 승선에 번번히 고베를 마셨고,  서울로 팀의 오른쪽 풀백으로 활약하다. 2009 시즌 군입대하면서 광주에서 뛰고 있다. A팀에 처음 선발되기엔 나이도 있고, 뛰어난 오른쪽 풀백들이 많다보니 대표팀 전망이 밝지 않다.

 

전재운(28.제주) - 공격형 미드필더와 쉐도우 스트라이커, 윙을 모두 겸할 수 있는 공격적인 선수. 청소년 대표 시절에도 어느 위치에서든지 제 몫을 해내던 선수였다. 킥력 또한 우수해 팀의 전담키커로 활약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장점을 드러내지 못해 2002년 울산대를 졸업하고 입단한 울산에서도 주전을 확보하지 못한채 많은 팀을 떠돌아다녔고, 올림픽대표팀에서도 경쟁자였던 김두현이나 이천수에게 밀리면서 서브로 활약해야만 했다. 지금도 많은 팀으로 이적하며 선수생활을 하고 있으며 현재 제주에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김영삼(27.광주) - 중앙과 측면에서 모두 플레이할 수 있는 전천후 선수. 정명고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프로팀의 관심을 받았지만 고려대를 선택. 대학에서 4년을 보내게 된다.

 

너무 오래 대학무대에서만 활약을 하다보니 올림픽 대표 선발에서 외면받기 시작하였고, 동기들에 비해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2005년 울산에 입단. 입단하자마자 1군에서 로테이션멤버로 활약하며 리그 우승에 일조했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몫을 충분히 해내는 선수로 평가받았고, 주전급 선수로 발돋음하게 된다. 하지만 김정남 감독이 물러나고 김호곤 감독이 부임하면서 출장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현재 군 문제 해결을 위해 상무 입대 예정이다.

 

 

김병채(28.대전 한수원) - 최전방 스트라이커, 중앙 미드필더, 중앙수비수등 멀티플레이어로 각광받았다. 2000년 프로 입단 이후에도 제 2의 유상철로 기대를 모았고,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멀티플레이어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 멀티 능력이 김병채에게는 독이 됐는지, 프로에서 김병채의 경쟁력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동기들보다 일찍 하향세에 접어들었다. 2009시즌을 끝으로 내셔널리그 대전 한수원으로 팀을 옮겨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 FW -

 

이천수(28.알 나스르) - 2000년 U-19 청대의 에이스. 부평고 시절부터 주목받았고, 1999년 방가반두컵 득점왕과 2000년 일본신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파라과이와 이탈리아 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이름을 대한민국 전역에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U-23감독이었던 허정무 감독또한 폭발적인 스피드와 탁월한 득점력을 겸비한 이천수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하기도 하였고, K리그 안양과 고려대가 막판까지 이천수를 스카우트 하기 위한과정은 전쟁을 방불케 했었다.

 

이천수는 결국 유럽진출을 위해 고려대를 선택했고, 고려대에 입학 후 유럽 여러구단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으며 유럽진출을 준비했다. 하지만 에이전트 문제 등으로 유럽진출에 난항을 겪었고, 2002년 울산에 입단하면서 유럽 진출을 잠시 미루게 된다. 울산에 입단하고, 2002 월드컵대표팀에도 선발되어 대한민국에 월드컵 4강에 진출하는데 기여하면서 이천수의 몸값은 치솟기 시작하였다. 여러 유럽구단에서 이천수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2003년 1월 레알 소시에다드에 입단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2년 6개월간의 스페인 생활동안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지 못한 이천수는 다시 국내 무대로 복귀 2005시즌 울산을 K리그 챔피언으로 이끌며 MVP를 차지하기도 한다.

 

울산에서의 활약뿐만 아니라 2006독일 월드컵에서도 주축선수로 맹활약하며 2007년 다시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이적 성공적인 유럽생활을 예상했으나 또다시 유럽무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2008년 수원임대되어 돌아왔다. 수원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없이 훈련중 태업을 보이면서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2009시즌 다시 전남에 임대되었으나 다시 사우디 구단과의 계약 논란으로 K리그 생활을 정리하고 현재 알 나스르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사건으로 인해 K리그 복귀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해외리그에서 선수생활을 계속 할 듯 하다.

 

박규선(28.부산) - 청소년대표팀에서 가장 빠른 주력을 자랑하던 선수. 이천수, 최태욱만큼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서울체고 시절부터 잠재력 풍부한 스트라이커로 평가받아 고교졸업 직후 울산에 입단했다. 주전으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울산이 키우던 미래의 주축선수로서 교체멤버로 활약했다.

 

입단 후 스트라이커 포지션을 버리고 우측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한 박규선은 몸싸움과 수비력은 부족했지만 빠른 순발력과 경험이 쌓이면서 최원권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고,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주전 오른쪽 풀백으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잠깐 A팀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지만 오른쪽 풀백에는 이미 송종국이 있었고, 후배 조원희(26.위건), 오범석(24.울산)의 급성장하면서 그 후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2007년 군에 입대해 광주에서 활약. 2009년에 제대를 하면서 2010 시즌 부산 아이파크에서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최태욱(28.전북) - 고교시절부터 이천수, 박용호와 함께 부평고를 고교최강의 자리로 올려놓았고, 고교시절부터 항상 이천수와 각급 대표를 거쳤으며 이로 인해 항상 이천수와 경쟁아닌 경쟁을 해야만 했다.

 

2000년 연세대의 유혹을 뿌리치고 안양에 입단했지만 자신이 원하던 중앙공격수가 아닌 측면 미드필더, 윙백으로 뛰게됐다. 국가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에서는 쉐도우 스트라이커나 윙포워드로 뛰었으나 소속팀 안양의 조광래 감독은 계속 윙백으로 뛸 것을 지시하였고, 2004년 인천으로 이적하면서 다시 본래의 포지션을 되찾게 되었다.

 

인천에서 한 시즌을 보냅 최태욱은 J리그 시미즈 S펄스의 이적 제안을 받고 2005년 이적해 일본에서 두 시즌을 보내게 된다. 시미즈와의 계약 만료 후 울산에 입단하려 했으나 연봉등의 문제로 울산 대신 포항행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포항에서 파리아스 감독의 전술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벤치멤버로 전락하고 말았고, 2007시즌 포항이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2008시즌 다시 전북 유니폼으로 갈아입게 되었고, 2009시즌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는데 수훈을 세웠다. 전북에서 이미 주전을 확보한 상태이기 때문에 2010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칠것으로 예상된다.

 

주광윤(27.광주) - U-16 시절부터 주목받던 유망주. 중대부고 졸업 후 고려대에 입학 최성국(26.광주), 김정우(27.광주)와 함께 고려대 01학번 트로이카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최성국과 김정우 모두 대학을 중퇴하고 2003년 프로에 진출할 당시 주광윤도 대학을 중퇴하고 전남에 입단하게 된다.

 

전남에 입단할 당시 많은 기대를 받고 입단했으나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뛰기엔 체격이 작고 몸싸움이 약하며,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뛰기도 어중간한 스타일이라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대학 동기 최성국, 김정우가 U-23, A팀으로 승승장구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정체된 모습을 보였고, 전남에서도 주전을 확보하지 못하며 특징 없는 스트라이커로 전락하고 말았다.

 

2009 시즌을 마치고 군 입대를 위해 상무에 지원한 상태며 군 입대 후 조재진처럼 급성장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전상대(27.대구) - 청소년대표시절 조재진, 주광윤에 밀려 주목받지 못한 스트라이커. 한양공고-숭실대를 졸업하고 2006년 경남에 입단. 경남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2008년 대구로 이적했으나 대구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이 없어 현재 대구 2군에서 뛰고있다.

 

 

조재진(28.감바) - U-19 주전스트라이커. 대신고 시절 탁월한 득점력으로 프로팀들의 관심을 받았고, 2000년 수원에 입단한다. 수원은 1998시즌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동국(30.전북)만큼 해줄것으로 기대했지만 당시 수원 스쿼드에서 조재진이 주전으로 활약하기란 힘이든 상황이었고 수원 구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대표팀에서도 이천수와 최태욱이 득점을 기록하는동안 약체 파키스탄전에서 한 골을 기록했을 뿐 대회기간 동안 부진을 거듭하며 팀은 결국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K리그로 돌아와서도 득점력 빈곤은 계속 되었고, 수원에서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2001시즌을 끝으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2003시즌 광주상무가 K리그에 참가하면서 광주 상무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게 된다. 광주 상무 시절에도 득점력은 떨어졌지만 활발한 움직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부동의 원톱을 차지하게 된다. 군 제대 후 수원에 복귀하게 되었고, 올림픽 본선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며 팀을 8강에 진출 시켰다. 하지만 소속팀 수원에서는 마르셀, 김동현에게 밀리면서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2004년 J리그 시미즈 S펄스로 이적하게 된다.

 

J리그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다시금 주목 받았지만 대표팀에서는 이동국에게 밀리면서 백업 스트라이커로 머물러 있었다.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이동국의 부상으로 주전을 꿰찬 조재진은 원톱 스트라이커로 무난한 활약을 보이며 유럽 클럽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J리그 계약기간이 만료되면서 유럽 진출을 시도했지만 끝내 불발 되었고, K리그 전북으로 이적했다. 전북 이적 후 시즌 10골을 기록하면서 전북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입지를 다지는 듯 했으나 한 시즌만에 J리그 감바오사카의 제의를 받고 이적. 국가대표와의 인연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 현재 상태는 J리그에 최적화된 스트라이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