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U-20대표. 12년만의 세계대회 예선통과. 하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재능들.
최고의 재능들 모이다.
2000년 U-19대표가 아시아선수권에서 4강진출에 실패 하며 세계대회 출전 좌절을 하면서 대한축구협회는 박성화 감독을 U-19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고, 최고의 선수들을 소집시켜 2002 아시아선수권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대표팀에는 4강둥이로 불리던 1983년생 선수들과, 2000년 U-16 선수들중 좋은 평가를 받았던 1984년생들이 주를 이뤄 대표팀이 구성되었다. 지난 청소년 대표팀의 특징이 조기 프로 진출선수들이 많았다면 03 U-20 대표팀은 당시 일찌감치 유럽에 진출한 권집,윤원일과 일본에서 활약하던 김근철, 김성길, 오장은등의 해외파, 그리고 이호, 이진호, 송한복, 오범석, 김동현, 박주영등의 브라질 유학파 상당수가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면서 많은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2002월드컵 개막전 치러진 U-19 중국과의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중국팀을 압도했고,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그렇게 U-20 대표팀은 주목을 받으며 U-19 아시아 선수권에 대비하게 된다.
예선 1차전 카타르와의 경기에서 김동현의 득점으로 승리를 기록한 대표팀은 2차전 우즈베키스탄을 2:0으로 격파하고 8강진출을 확정시킨다. 8강이 확정된 상황에서 U-19 대표팀은서 태국과 0:0 무승부를 기록며 조1위를 기록. 인도와 8강에서 대결하게 됐다. 하지만 인도는 대한민국의 상대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공세를 펼친 끝에 인도를 7:0으로 격파하고 4강에 진출 2000년 예선 탈락으로 참가하지 못한 세계대회 출전티켓을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대표팀의 목표는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준결승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2:1로 꺾고 일본과 결승전을 치르게 됐다. 일본과의 결승경기에서도 일본을 압도했지만 득점을 기록하지 못하다 연장6분 정조국의 골든골로 일본을 꺾고 4년만에 우승컵을 탈환했다.
예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대표팀. 졸전의 연속. 그리고 치욕적인 패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성화 감독은 세계대회를 앞두고 선수단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예선명단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김근철(27.부산), 송한복(26.전남)등은 그 이후에도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고, 고창현(27.대전)처럼 예선에는 참가했지만 본선에는 합류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있었다. 이 선수들을 대신해서 이호, 오범석, 김진규, 박주영등 새로운 선수들이 팀에 합류하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의 대표팀이 되어갔다. 새로운 선수들이 몇몇 합류하였다고는 하나 UAE출국전 치러진 일본과의 평가전에서나 본선에서의 모습은 과거 보여줬던 화려했던 U-20 대표팀의 경기력은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1차전 대한민국VS독일
2003 U-20 월드컵 대한민국의 첫 상대는 독일. 2002 월드컵 4강전에서 0:1로 패했던 선배들을 대신해 설욕하겠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 당시 U-20연령대의 선수였던 람, 슈바이인스타이거, 렌싱등 독일내 최고 유망주 선수들은 대회에 불참하였으나 당시 독일의 수비라인을 이끌던 후트, 트로호프스키, 오돈코어등이 대회에 참가해 막강 전력을 구축한 독일이었다. 경기에서도 시종일관 독일에게 밀리는 양상을 보였고, 당시 권집-여효진의 중앙 미드필더 라인이 독일에 압도당하면서 경기 내내 밀리고 말았다. 다행히 주전 GK김영광의 선방으로 여러차례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경기 내용은 밀렸지만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게임. 경기 내용은 밀렸지만 대한민국은 역습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이호진과 이종민의 득점으로 난적 독일을 2:0으로 잡고 16강에 대한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2차전 대한민국VS파라과이
1차전에서 독일은 잡은 대한민국을 기다리고 있던 파라과이. 남미의 강호 파라과이가 2차전의 상대였다. 바레토, 발데스등 향후 파라과이를 이끌게될 주축 선수들로 구성된 파라과이 또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볼 점유율 면에서는 비등하였으나 대한민국팀보다는 좀 더 매끄러운 경기운영을 펼쳤던 파라과이의 벨라스케스에서 골을 허용하며 0:1로 밀리고 말았다. 1차전에서와 마찬가지로 권집-여효진 라인으로 중앙 미드필더 라인을 구성했던 대한민국은 또다시 중원싸움에서 밀리고 말았고, 후반 이호가 교체해 들어가면서 상황이 나아지는 듯 하였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0:1패배. 16강을 안심할 수 없게된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3차전 미국과의 경기에서 이기거나 무승부를 거두면 16강 진출을 확정할 수 있었지만 패한다면 16강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차전 대한민국VS미국
2002년 월드컵, 2003 U-17월드컵에 이어 FIFA주관 메이저 대회에서의 세 번째 만남. 국제무대에서 상승세를 보이고 있던 양 국가의 대결이어서 그 어느때보다 관심이 컸고, 축구신동 아두의 등장으로 미국팀은 그 어느때보다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무승부에 중점을 준 듯한 느낌의 선수 구성으로 미국전에 대비했다. 중원에서 게임을 풀어나가던 권집 대신 수비력이 좋은 이호를 선발 출전시켜 중원 수비 강화에 중점을 뒀다. 이미 2골차 이상으로 패하지만 않는다면 16강 진출을 확정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무리하게 공격을 하지 않았고, 수비에 중점을 둔 플레이를 펼쳤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인해 에디 존슨에게 2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2:0으로 앞서나간 미국은 16강 진출을 거의 확정시킨 상황이라 그 후 무리하게 경기를 진행하지 않았고, 대한민국 또한 득점을 올리겠다는 의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경기내내 공만 주고받기를 반복. 0:2으로 패하였으나 대한민국은 와일드 카드 자격으로 16강 진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1,2차전에서 보여준 기대 이하의 경기력과 3차전 미국과의 경기에서 이기겠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질 않고, 시종일관 공만 돌리다 끝을 내면서 국내외 많은 비판에 시달리고 말았다.
16강 대한민국VS일본
16강의 상대는 숙적 일본. 그동안 아시아권 대회에서는 자주 대결을 펼쳤으나 FIFA주관 세계대회에서 처음 맞붙게 되었다. 과거 U-19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일본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선수들은 일본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하지만 U-20월드컵에 참가한 일본은 당시와의 팀과는 너무도 달랐다. 출국전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일본에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고, 당시의 일본팀은 쉽지 않은 상대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주도권은 대한민국이 잡기 시작했다. 최성국의 선제골로 1: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고, 경기 내용 또한 예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반전이 끝날때만 하더라도 1991년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했던 U-20대회 8강 진출을 12년만에 이룩할 수 있을거란 기대감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힘을 쏟아부었는지 선수들이 하나, 둘씩 주저앉기 시작했고, 왼쪽 날개 조원희마저 부상으로 나가면서 선수 교체를 해야만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이미 이호진과 남궁웅이 부상으로 더 이상 경기에 뛸 수 없는 상황이었고, 한재웅과 박주영을 놓고 고심하던 박성화감독은 한재웅을 출전시키기에 이른다. 교체멤버로 들어간 한재웅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고, 결국 실수를 남발. 지칠대로 지친 다른 선수들도 실수를 하였고, 측면 수비수 오범석의 실수로 일본의 사카다에게 골을 허용하며 1:1. 결국 연장전에 들어가고 말았다. 연장전에서도 지칠대로 지친 대한민국은 사카다와 히라야마의 파상공새를 막기에도 바뻤다. 조금씩 밀리는 모습을 보이다 연장 전반 사카다에게 통한의 골든골을 허용하며 1:2패배. 2003년 대한민국의 U-20 월드컵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U-20 대표팀 선수들
김영광(29.울산) - 2000년 두 살 많은 형들과 U-19에 선발될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던 GK.1998년 U-16대표 시절부터 대한민국 골문을 지킬 미래로 평가받으며 승승장구 했다. 83년생이 주축이 된 2002년 U-19 대표팀에서도 김영광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당시 2002년 월드컵 4강 예비엔트리였던 염동균(29.승부조작)과 전남에서 활약했고, 한 소속팀의 두GK가 번갈아 가며 대표팀에 선발되어 주전 골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둘의 경쟁은 평가전에서 실수를 범하며 박성화 감독의 눈에서 멀어진 염동균이 먼저 낙오를 하였고, 대표팀 주전GK 자리는 김영광이 차지해 U-20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친 몇 안되는 선수로 평가받았다.
광양제철고 졸업 후 전남에 입단해 좋은 활약을 펼쳤고, 2004아테네 올림픽에서도 주전GK로 활약. 2006년월드컵 엔트리에도 합류해 주전GK이운재(39.전남)을 보좌했다. 2006월드컵이 끝나고 주전GK로 활약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운재의 장기 집권과 신예 정성룡(27.수원)의 등장으로 대표팀의 세 번째 GK로 밀리고 말았다. 남아공월드컵이 끝나고 이운재의 은퇴 이후에도 정성룡에게 밀린상황. 탁월한 순발력과 환상적인 세이브 능력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공중볼에 취약한 약점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 전남에서 울산으로 이적한 후에도 주전GK로 활약하며 울산의 골문을 든든이 지키며 2011년 K리그에서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베스트11에도 선정. 최근 선임된 최강희 대표팀 감독이 그동안 김영광에 대한 평가가 좋았던 만큼 이운재-김병지 이후 가장 대표팀에서의 주전 GK 싸움이 될거라 예상된다.
성경일(29.승부조작) - 김영광의 백업 골키퍼. 촉망받는 골키퍼였던 염동균이 최종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들쭉날쭉한 평가를 받았지만 성경일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김영광, 염동균등 뛰어난 GK들이 동기생들중에 많다보니 눈에 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백업멤버라도 꾸준하게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청소년 대표팀 이후에도 올림픽 대표에도 선발되었지만 김영광이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대학 졸업 후 전북 현대에 입단하였으나 당시 주전GK 이용발의 백업이었고, 이용발이 경남으로 이적한 이후에도 무섭게 떠오른 권순태의 등장으로 다시 백업GK. 경남으로 이적 후 상무에 입대하였으나 승부조작 혐의를 받아 현재를 축구계를 떠난 상태다.
김호준(28.상주) - U-20대표팀의 세 번째 골리. 황지중 시절 U-15 상비군에 선발될 정도로 기량을 인정받았고, 강릉농공고-고려대를 거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영광이라는 절대NO.1으로 인해 기량을 보여줄만한 기회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FC서울에 입단해 프로생활을 시작했으나 FC서울에도 국가대표GK출신 김병지(42.경남)가 버티고 있어 좀처럼 출장 기회를 잡지 못했다. 김병지가 대표팀 차출과 부상으로 잠시 골문을 비운 사이 경기에 나서 좋은 활약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 후 주전으로 활약하며 FC서울의 골문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FC서울의 주전GK로 활약을 하는가 싶었으나 성남에서 김용대(32.FC서울)가 이적해오면서 제주로 이적을 결심 제주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다 군에 입대해 2012시즌 상주 상무에서 U-15 상비군 시절 함께 선발되기도 하였던 권순태(28.상주)와 치열한 주전경쟁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J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전북으로 돌아왔고, 올림픽대표팀에도 잠깐 이름을 올렸지만 결국 최종엔트리에는 들지 못하고 예비엔트리에 만족해야만 했다. 2006년 울산으로 이적한 이후 2007시즌 다시 전북으로 복귀 서서히 폼을 되찾으며 2009시즌에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끄는데 활약을 하기도 하였다. 과거 대표팀에도 잠시 이름을 올리고, A매치 출전도 하였지만 현재 A팀으로 다시 선발되기는 힘든 상황. 소속팀 전북에서도 조성환-심우연에 밀려 주전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지만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를 모두 소화가 가능하기에 전북에게 필요한 선수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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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27.FC서울) - 아르헨티나와의 평가전에서 강력한 프리킥으로 이름을 알린 김진규.1983-84년생이 주축인 대표팀에 박주영과 함께 유이한 1985년생 선수였던 김진규.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박주영과 달리 김진규는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고, 안정된 수비력으로 대한민국 수비의 미래로 평가받았다. 안동고 졸업 후 전남에 입단. 제2의 김태영으로 불리었으나 갑작스런 J리그 진출. 국내 복귀 후 FC서울로 이적. 아시안컵 대표로 A팀에 승선한 이후 2006월드컵에서도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며 승승장구.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김진규의 활약을 기대했다.
하지만 소속팀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허정무감독 체제의 대표팀에서는 좀처럼 선발되지 않았고, 결국 월드컵에서 김진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중국과 일본리그에서 뛰다 최근 전 소속팀 FC서울로 복귀. 불안했던 수비라인을 진두지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발은 느리지만 탁월한 대인마크와 그동안 축적된 경험으로 FC서울에서 주전으로 활약할 것으로 예상.
여효진(29.부산) - 히딩크가 선택한 남자. 여효진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면 그 다음 떠 오르는 문장이다. 2002월드컵당시 최성국,정조국,염동균과 함께 연습생 신분으로 2002월드컵을 경험했고,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의 극찬을 받던 선수. 하지만 그 후 선발된 U-20대표팀에서의 여효진은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줬다. 당시 좋은 수비력을 보여줬던 김유진(29.라오닝)대신 여효진이 선발되었을땐 논란이 일기도.
히딩크가 미래의 중앙 수비수로 극찬했던것과 달리 U-20 월드컵에서는 권집과 함께 중앙미드필더로 출장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좋은활약을 펼쳐줄거라 예상했던 박성화감독의 기대와 달리 계속된 부진으로 인해 부상으로 하차한 김수형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들 정도로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줬다. U-20 월드컵이 끝나고 올림픽 대표팀에도 잠시 선발되었으나 계속된 부진과 부상으로 더 이상 대표팀에서 여효진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고려대를 거쳐 FC서울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부상으로 시달리다보니 더 이상 서울에는 여효진의 자리는 없었다. 잠시 J2리그를 거친 후 다시 FC서울로 복귀. 이번시즌 부산으로 이적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 하였으나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해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을 당한 상태. 부산 유니폼을 입고 필드에 나서는 모습은 내년에나 가능할 듯 싶다. 좋은 하드웨어를 갖춘 유망주였으나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오범석(28.수원) - 역대 U-20대표팀 중 전 포지션에 걸쳐 가장 안정적인 전력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당시 청소년대표팀의 문제점은 오른쪽 측면이었다.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던 조성윤이 계속된 부진으로 인해 새로운 오른쪽 풀백을 찾던 중 당시 포철공고 소속이었던 오범석이 박성화 감독의 눈에 들어오게 되면서 U-20대표팀에 합류. 오른쪽 측면 수비의 불안을 해소하기에 이르렀다. 안정적인 수비력을 인정받아 주전으로 활약하며 청소년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 일본전 실수를 제외하고는 완벽할 플레이를 펼쳤다.
청소년 대표팀 이후 최원권, 박규선등의 측면자원으로 인해 올림픽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2005년 A팀에 선발되었고, 소속팀 포항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입지를 다지기 시작해 2007 아시안컵에서는 주전으로 활약하며 송종국 이후 오른쪽 측면은 오범석의 자리가 되어 2010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하게 된다. 소속팀 포항과의 불화도 있었지만 러시아 무대에도 진출해 활약을 하다 울산을 거쳐 현재 수원에서 활약. 현제 국가대표급 선수들로 차두리, 최효진, 김창수등 오른쪽 풀백에 좋은 선수들이 많아 앞으로도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조원희(29.광저우) - 아시아 선수권대회부터 엔트리에 포함되었으나 좀처럼 출장기회를 잡지 못했다. 당시 최종 엔트리 합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나 프로진출 1년만에 군에 입대 하여 상무 소속으로는 최초(?)로 U-20월드컵 멤버로 선발되었다. 예선에는 조성윤의 벽을 넘지 못했고, 본선에서도 오범석의 존재로 인해 좀처럼 자신의 포지션에서 뛸 기회가 없던중 왼쪽 미드필더들의 줄부상으로 인해 조원희에게도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2차전 교체 출전 이후 주전과 교체멤버로 출전을 하였으나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청소년 대표팀 시절 활약도 미미했고, 군 제대 후 울산에서 수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눈에 띄지 않다보니 올림픽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하지만 수원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하더니 주전으로 발돋음하였고, 대표팀에 선발되어 대표팀 데뷔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는등 급성장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 월드컵 엔트리 선발되기도 하였다. 2007시즌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한 이후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K리그 최고의 홀딩 미드필더로 각광받기에 이르렀고, 2008시즌 수원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후 EPL 위건에 입단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무리한 대표팀 차출 일정과 부상으로 인해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로 인해 출장 기회가 줄어들면서 폼이 하락하기 시작하였고, 대표팀에서도 김남일(34.인천), 김정우(30.전북)등에게 밀리면서 결국 엔트리 탈락의 아픔을 맛보고 말았다. 현재 중국 슈퍼리그 챔피언 광저우 헝다의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고 있으며 리그와 AFC챔피언스리그에서 맹활약 한다면 조만간 대표팀에서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004년 인천에 입단해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파르티잔에 잠시 임대선수로 진출한 후 인천에 복귀 전남-FC서울을 거쳐 군입대를 한 상황이다. 올림픽 대표팀에도 잠시 선발되어 당시 주전 왼쪽 윙백 김동진(30.FC서울)과 경쟁을 하였으나 경쟁에서 밀리며 본선무대를 밟지 못했다. 부동의 주전 이영표(35.벤쿠버)와 김동진의 존재로 인해 좀처럼 대표팀에서 자리를 못잡는 듯 했으나 2007 아시안컵 당시 이영표의 부상과 김동진이 중앙수비수로 출전을 하게 되면서 왼쪽 주전으로 활약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후 꾸준히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으나 이영표와 김동진이 김치우의 앞을 가로막았고, 결정적인 기회가 생기면 부상으로 기회를 잡지 못하고 말았다. 이영표의 대표팀 은퇴와 김동진의 부진으로 왼쪽풀백가 많이 불안한 상황이며 다시 한번 왼쪽 측면 수비수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박주성(28.베갈타 센다이) - 거제중, 마산공고 시절 공격수로 이름을 날리던 박주성은 19세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고, 그 대회에서의 맹활약으로 네덜란드 명문 페예노르트의 관심을 받기도 했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던 측면수비수. 2003년 4월경 코엘류 사단에 선발되어 일본과의 경기에 출전할 정도로 각광받는 선수였다. 하지만 본선 1차전에서 부상으로 김치우와 교체된 이후 대회가 끝날때까지 벤치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고교 졸업 후 수원에 입단해 김호의 아이들로 불리며 기대를 받기 시작하였고, A대표팀에도 선발 되는등 승승장구 하는 듯 하였으나 고질적인 부상으로 인해 번번히 기회를 놓치기 시작하였고, 2004년 차범근 감독이 수원의 지휘봉을 잡은 이후 좀처럼 출장할 기회가 생기질 않았다. 2005년 군에 입대해 군생활을 마친 후 다시 수원에 복귀하였으나 그 후에도 경기에 나서질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결국 이적을 결심. 2009시즌 당시 J2였던 베갈타 센다이로 이적해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다.
권집(28.승부조작) - 당시 U20대표팀의 핵심 미드필더. 동북중 시절부터 천재 미드필더로 유명세를 탔고, 동북고 시절에도 김근철(29.전남)과 함께 고교 NO.1을 다투던 최고의 미드필더였다. 고교 졸업 후 당시엔 이례적으로 FC쾰른 유소년팀에 입단해 유럽 진출에 성공했으며, 일찌감치 청소년 대표팀 엔트리에서 탈락한 김근철과 달리 꾸준하게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고, 주전으로 활약하며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베스트11에도 선정. 당시 핵심전력으로 평가받았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대인마크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볼 키핑 능력과 패싱능력을 보여주며 세계대회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청소년월드컵 본선에서는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계속된 부진으로 인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대회가 끝난 이후 쾰른에서도 성인팀 승격에 실패하고, K리그와 J리그를 놓고 고심을 하던 중 수원의 적극적인 구애로 수원에 입단하기에 이른다. 김호감독 시절 중용을 받으며 수원의 주축 선수로 성장하는가 싶었으나 차범근 감독 부임 이후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올림픽 대표팀에도 선발되지 못하드는등 슬럼프를 맞게 된다.
수원에서 주전 확보 실패 후 부산-전남-전북-포항-대전등을 떠돌아 다니는 저니맨 신세에 이르고 말았다. 계속된 주전확보 실패로 인해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결국 2010시즌 갑작스럽게 해외 이적을 추전하기에 이르렀고, 중국의 텐진 테다에 입단해 중국에서 선수생활을 이어 나가는 듯 하였다. 하지만 K리그 승부조작에 연루되면서 결국 텐진에서도 선수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고, 국내 복귀. 선수 영구제명을 당하면서 더 이상 권집의 선수생활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국내로 돌아와 중동고를 거쳐 2003년 울산에 입단. 울산에 입단 하자마자 좋은 플레이로 박성화 감독의 눈에 들면서 U20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합류하게 된다. 팀에 합류했지만 대회 초반 여효진-권집 라인으로 중원을 구성을 하다보니 좀처럼 선발로 출전을 할 수가 없었다. 3차전 미국과의 경기에서부터 선발로 출전을 하게 되었고, 16강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1차전부터 선발 출전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청소년대표팀 이후 소속팀 울산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고,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아드보카트 감독에 눈에 들면서 A팀에도 합류. 2006독일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승승장구하기에 이른다. 월드컵이 끝나고 아드보카트감독과 함께 제니트로 이적하게 됐고, 이적 초기만 하더라도 제니트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 샤흐타르 소속이던 티모슈크(32.B.뮌헨)가 이적해오면서 주전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고, 경기에 출전을 하지 못하다보니 대표팀 경쟁에서도 밀리게 되었고, 결국 국내 복귀를 결심. 성남으로 이적을 하였으나 성남에서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채 알 아인과 오미야를 거쳐 다시 울산으로 이적한 상황이다. 어린 나이에 많은 경험을 갖고 있어 기대가 큰 선수였지만 예전만큼 뛰어난 압박과 패스 차단 능력이 사라진 것 같아 많이 아쉬움이 남는 선수.
이종민(29.상주) - 2002년 중국과의 평가전에 TV에 중계되었고, 그 경기에 맹활약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빠른 발과 뛰어난 개인기를 보여주며 소속팀 선배였던 서정원의 후계자로 지목 받을 정도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U19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으로 오른쪽 측면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줬다. 세계대회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고, 상당수 선수들 또한 부진했으나 당시 이종민은 전경기 풀 타임 출장할 정도로 오른쪽 측면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제 몫을 해낸 몇 안되는 선수 중 하나였다. U20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이종민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진출한 프로무대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것도 당시 리그 강호로 평가받는 수원이었고, 많은 측면 자원으로 인해 좀처럼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다행히 프로 2년차에 접어들면서 경기 출장횟수가 늘어났으나 당시 유망주보다는 베테랑 선수를 중용하던 차범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출장기회를 잡지 못하다 결국 울산으로 이적을 하기에 이른다. 울산 이적 후 주전으로 활약하며 리그 우승을 차지.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는등 전성기를 맞는 듯 했다. 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해 필드에 나서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대표팀과의 인연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FC서울을 거쳐 현재 군복무를 위해 상주 상무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번 시즌 후반 소속팀으로 복귀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호진은 K리그 보다는 해외 이적에 염두를 둔 상황이었고, 해외 이적을 위해 여러 구단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좋은 평가를 내렸다는 이야기만 들려올 뿐 정작 계약을 하자고 나서는 구단이 없었다. 유럽 여러곳을 다니며 입단 테스트를 받던 중 라싱 산탄데르의 입단테스트를 통과 어렵게 유럽 진출에 성공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리그 최종전에서나 이호진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최종전에서 좋은 활약을 펼체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새시즌 재계약에 실패하고 말았고, K리그 드래프트 3순위로 인천에 입단한다. 하지만 몸상태가 좋지않았고, 2군을 전전하다 인천에서도 방출 핀란드와 태국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현재 고양 국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박주영(27.아스날) - U20월드컵 엔트리 발표 당시 유일한 고교생 선수. 청구고 시절부터 천재로 불리웠고, 언론에서는 100년에 한명 나올만한 천재, 제2의 김병수로 극찬하던 박주영이 U20대표팀에 선발됐다. 최전방,측면 공격수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소화가 가능해 당시 많은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본선에서는 단1분도 출전하지 못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일본과의 16강 경기에서 한재웅 대신 투입됐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할 정도로 박주영의 기대가 컸다.
당시에는 대표팀 막내였지만 2년후에는 U20팀의 에이스로서 맹활약. A팀입성과 2006, 2010월드컵 출전, 2008올림픽 출전으로 한국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K리그 진출을 위해 고려대를 중퇴하고 FC서울에 입단할 당시에서 포항과 스카우트 진통이 일어날 정도로 이슈를 몰고 다녔고, 그해 신인왕 수상, 득점2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FC서울과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모나코를 거쳐 현재 아스날 소속으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상황. 현재 많은 경기에 출장하고 있지 못하지만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거라 기대한다.
최성국(29.승부조작) - 2002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현란한 개인기로 중국 수비진을 농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리틀 마라도나가 나타났다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 2002월드컵 예비엔트리에 포함돼 벤치에서 대표팀이 4강에 진출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2006년의 월드컵은 최성국의 월드컵이 될거라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다. 그 기대되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청소년대표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조금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U20월드컵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며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빠른 돌파와 상대 수비를 가볍게 제칠 수 있는 드리블 능력으로 상대 진영을 휘젖고 다닌 능력을 보여주며 이제껏 한국선수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플레이를 보여준다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대를 중퇴하고 울산에 입단한 후 김영광,김치곤과 함께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고 주전으로 활약하였고, 2005년 울산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주전으로 활약했다. A팀에서도 최성국의 이름을 볼 수 있을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본프레레 감독 부임 이후 좀처럼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고, 결국 2006월드컵에서 최성국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잠시 J리그 생활을 경험한 후 성남과 상무를 거쳐 수원으로 이적. 하지만 상무시절 승부조작에 가담한 혐의를 받아 현재 판결을 기다리는 상태. 이런 상황에서 마케도니아 이적을 추진하면서 현재 많은 축구팬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정조국(28.낭시
아시아선수권대회 전까지 정조국-최성국 부동의 투톱이었으나 갑작스럽게 김동현이 등장하면서 정조국을 위협하기 시작. 비슷한 성향의 두 선수가 함께 뛰다보니 자주 겹치는 모습이 목격이되도 하였다. 매 경기 득점을 올리면서 김동현이 주목받는 사이 정조국은 조금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일본과의 결승 연장전에서 골든골을 성공시키며 4년만에 우승을 차지. 다시 정조국이 앞서 나가는 듯 하였지만 김동현의 무서운 성장세로 인해 본선에도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U20월드컵에서와는 달리 K리그에서는 신인으로서는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고, 결국 신인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올림픽 대표팀 탈락 이후 대표팀과의 인연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고, 간간히 A팀에 선발되었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소속팀에서 박주영이 입단하고, 인천에서 데얀이 이적해오면서 주전에서도 밀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2010시즌 FC서울이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후 프랑스 리그1 옥세르의 이적제의를 받고 이적을 결심. 옥세르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낭시로 임대된 상황. 하지만 병역 문제로 인해 조만간 국내로 돌아올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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