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서정원
생년월일: 1970년 12월 17일
신장 : 172cm 체중 : 68kg
포지션 : AMR/AML
출신교 및 클럽 : 거제고 - 고려대 - 안양 - 상무 -
안양 - 스트라스부르(FRA) - 수원 - 잘츠부르크
(AUS) - SV 리트(AUS)
뒤늦게 시작한 축구.
중학시절 축구선수였던 형을 따라 시작한 축구. 타고난 재능이었을까? 끊임없는 노력이었을까? 남들보다 뒤늦게 축구를 시작했지만 고교시절 그를 따라 올만한 선수는 없었다. 폭발적인 스피드, 화려한 개인기, 정확한 골 결정력 등을 바탕으로 1986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선수권에서 팀의 우승과 함께 11골로 득점왕을 수상했다.(헤트트릭 2회를 기록하며 아직도 대회 기록으로 남아있다.)
고교 NO.1 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리던 서정원은 거제고 졸업 후 고려대에 입학을 하기로 결정한다. 고려대에 입학한 서정원은 당시 최연소로 대표팀 골키퍼에 선발되기도 했던 김봉수, 천재 플레이 메이커 김병수와 함께 1학년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학 최고의 스타로 올라섰다. 그런 서정원을 지켜봐온 당시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회택감독은 서정원을 예비엔트리에 포함시킨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참가한 한국팀 개막 전 지난 대회에서의 선전과 아시아 예선을 최고의 성적으로 통과해 대회 다크호스로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본 결과 역시 세계축구와의 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결과는 3전 전패. 선배들이 무기력하게 예선 탈락하는 모습을 지켜본 서정원은 4년 후를 기약한다.
본격적인 스포트라이트 U-23 올림픽대표 선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축구종목에 출전 연령제한이 시작됐다. 23세 이하의 선수들만이 참가할 수 있게된 것. 69년 7월1일 이후의 출생자들로 연령을 제한. 김봉수,신범철,정재권,이임생,강철,노정윤,김병수,신태용등 지금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스타들과 함께 올림픽예선에 참가한다.
축구협회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8강이상의 진출을 목표를 위해 68년 독일의 크라우천 청소년대표팀 감독 선임이후 24년만에 외국인 감독을 선임한다. 그 주인공은 일본대표팀의 기술고문을 맡아 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디트마르 크라머.
당시 미우라가 이끄는 일본과, 장진, 하오하이동의 중국을 꺾고 32년 만에 자력으로 올림픽에 진출하게된다. 32년 만에 자력으로 올림픽 티켓을 따낸 대표팀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한 스페인 올림픽 대표팀과의 대결에서 2:3으로 아쉽게 패하는 등 나날이 향상된 경기력을 보이며 본선에서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본선에서 만난 모로코, 파라과이, 스웨덴과 한 조에 편성된 한국은 우세한 경기력을 펼치고도 모로코, 파라과이와 무승부를 기록. 마지막 스웨덴과의 경기만 남아있었다. 토마스 브롤린이 이끌던 스웨덴은 조에서 가장 강한 상대. 반드시 승리해야만 8강 진출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전반에 서정원이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뜨리며 골키퍼와 1:1찬스를 맞았고, 가슴 트레핑으로 골키퍼를 제친 후 골을 성공. 한국이 1:0으로 앞서나가며 8강 진출에 희망을 갖게했다. 하지만 결국 후반 실점하며 또다시 무승부를 기록 3무승부로 조3위를 기록. 조예선 탈락하고 만다.
스웨덴 경기가 끝나고 외신 기자들이 서정원에게 인터뷰를 요청할 정도로 서정원은 올림픽 스타가 되었고, 올림픽이 끝난 후 스페인 명문 바르셀로나, 발렌시아등에서 영입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그의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프로무대 시작. 유럽? K리그?
대학 4학년이던 91년.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당시 올림픽대표팀 총감독이었던 크라머 감독의 추천으로 분데스리가 진출을 추진하고 있었다. 베르더 브레멘, 바이에른 레버쿠젠등 분데스리가 명문팀들이 영입에 나섰고 서정원은 그렇게 유럽에 진출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서정원은 병역미필상태.
당시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던 안양의 끈질긴 러브콜과 군문제로 결국 분데스리가 진출을 포기하고 K리그 드래프트를 신청한다. 서정원이 드래프트를 신청하기만을 기다리던 리그 최하위 안양이 드래프트 1순위로 서정원을 지목. 그의 첫 프로생활은 유럽무대가 아닌 국내에서 시작하게 됐다.
마음은 유럽에 가 있어서였을까? 대표팀에서의 맹활약과 달리 K리그에서의 활약은 신통치 못했다. 92년부터 안양에서 뛰기 시작했지만 97년 아디다스컵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것 외에 프로리그에서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첫 월드컵 출전. 그리고 첫 득점.
힘겹게 아시아 최종예선을 통과한 한국은 스페인, 볼리비아, 독일과 한 조에 편성됐다.
예선 1차전 스페인과의 경기. 해외 언론은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졸전과 예선을 힘겹게 통과한 한국을 조 최하위로 평가하고 있었고, 스페인 감독은 경기전 한국을 5:0으로 꺾겠다고 할 정도로 당시 한국팀의 전력을 하향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고, 스페인 수비수 나달의 퇴장으로 수적으로 우세해진 한국은 스페인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우세한 경기내용을 보였지만 전반을 0:0으로 마감해야만 했다. 후반들어 파상공세를 펼치던 한국은 스페인의 역습 두 번에 모두 골을 허용하며 0:2로 뒤지고 말았다. 김호감독은 공격적인 전술을 위해 홍명보를 중앙으로 올리고, 체력이 떨어진 스페인 수비라인을 휘젓기 위해 서정원을 김주성과 교대하며 투입시킨다. 후반 투입된 서정원은 빠른 돌파로 스페인 수비를 교란하기 시작했다.
경기종료 6분을 남기고 홍명보의 프리킥이 골로 연결되며 한국팀은 기적을 연출할 준비가 됐었고, 경기종료직전 홍명보의 패스를 받은 서정원이 강력한 슈팅으로 동점골을 성공. 2:2 무승부의 기적을 연출했다.
스페인과 2:2 무승부의 선전을 기록한 한국은 볼리비아와의 대결에 강한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볼리비아와 경기에서 선발 출장한 서정원은 오른쪽 측면에서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빠른발을 이용해 볼리비아 수비진을 농락했고, 몇 차례의 슈팅은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곤 했다. 경기는 0:0 무승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처럼 예선 2경기를 모두 비기면서 마지막 독일과의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16강에 진출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전반에 내리 3골을 허용하며 포기하는 분위기 였으나 한국은 놀라운 투혼으로 후반 2골을 만회하며 독일을 끝까지 몰아부쳤지만 결국 2:3으로 패하며 2무1패로 예선 탈락하고 만다.
유럽무대 도전. 계속된 엇갈림.
94 미국 월드컵을 참가하며 유럽선수들과 기량을 겨룬 서정원은 유럽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커졌다. 상무에서 제대를 하고 안양에서 K리그생활을 하며 유럽 진출을 기다리던 서정원에게 입단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적제의가 들어온 곳은 포르투갈의 축구명문 벤피카. 서정원은 곧바로 포르투갈로 날아간다.
그곳에서 입단을 확정짓고 백넘버9번의 유니폼까지 한국으로 갖고 왔으나 벤피카 측에서 최종예선 차출을 유보하자는 계약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당시 전력이 급성장한 일본과 베일에 가려진 구 소련연방의 팀들로 월드컵 진출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회와 차범근 감독은 이를 거부하며 이적동의서 발급을 거부했고, 그의 유럽행은 또다시 멀어져만갔다.
결국 한동안 유럽행을 포기하고, 월드컵 최종예선에 집중한 서정원은 일본과의 최종예선 원정경기에서 0:1로 뒤지던 상황에서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동점을 만들었고, 역전승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일본과의 원정경기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한국팀은 승승장구했고, 최종예선을 조1위로 가뿐히 통과했다.
그 후 분데스리가 FC쾰른에서의 영입제의. 안양은 서정원을 붙잡고 싶던 마음이 더 컸는지 이번에는 이적료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구단의 반대했다. 서정원은 자신이 받기로 한 이적료 50%를 포기하겠다고 할 정도로 유럽진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끝내 구단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고, 결국 또다시 무산되고 말았다.
계속된 도전 끝에 97년 12월. 결국 프랑스 리그1 스트라스부르에 입단하게 된다. 리그 첫 경기부터 조금은 어색한 27번을 달고 경기에 출전한 서정원은 데뷔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며 눈부신 데뷔전을 치뤘다. 그 후 팀을 리그강등에서 탈출을 시키는데 성공하며, 프랑스에 '쎄오' 열풍을 일으켰다.
아쉬운 98 프랑스 월드컵. 그리고 유럽 생활의 위기.
프랑스에서의 성공적인 데뷔로 월드컵에서 서정원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대표팀은 당시 유럽에서 활약하는 서정원과 노정윤(34.울산)을 합류시키며 16강 진출을 목표로 대비를 했으나 황선홍의 부상과 서정원이 수두로 합류가 늦어지면서 많은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1차전 멕시코와의 경기. 수두로 인해 컨디션 난조로 서정원은 후반 25분 투입됐고, 한국은 하석주의 선제골을 지키지 못한 채 1:3의 패배를 당하고 만다.
2차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한 서정원은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네덜란드 수비진을 몇차례 교란시켰으나 네덜란드는 강했다. 0:5의 스코어가 말 해주듯 한국팀은 참패를 당하고 만다. (경기가 끝난 후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팀에서 이동국(26.포항)과 서정원을 인상적인 선수로 꼽기도 했다.)
예선전적 2패로 예선탈락이 확정된 한국은 1승이라도 거두고 돌아가기 위해 차범근 감독까지 경질하고, 3차전 벨기에와의 경기에 나선다. 90분간 벨기에 골문을 위협했으나 룩 닐리스와 유상철(34.울산)이 한 골씩 넣으며 1:1 무승부. 1무 2패로 첫 승은 다음 대회로 미뤄야만 했다.
98-99시즌 서정원에 대한 팀의 기대는 대단했다. 처음 달던 배번인 27번에서 서정원이 좋아하던 11번으로 바꿔줄 정도로 팀의 기대는 컸다. 또한 스트라스부르 시내에 대형광고판에 서정원의 얼굴이 나갈 정도로 스트라스부르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밋빛 인생으로 보이던 그의 프랑스 생활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르로이 단장과 만코프스키 감독체제로 바뀌게 된 것. 만코프스키 감독은 당시 부임하면서 데려온 선수들을 중용하면서 좀처럼 서정원은 경기에 나서질 못했고, 몇 달째 경기에 나서지 못하자 서정원은 단장에게 해외구단으로 이적을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거절당했다.
한편 스트라스부르의 리그순위는 점점 강등권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팀의 형편없는 리그순위를 지켜본 서포터들은 팀의 핵심맴버로 꼽히던 서정원을 계속 출장시키지 않자 빗발치는 항의가 계속되기 시작했고, 당황한 구단 측은 결국 서정원을 다시 경기에 투입시킨다.
4개월만에 경기에 나선 서정원은 팀이 0: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반 종료직전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자신이 왜 경기에 뛰어야만 하는지 구단 관계자들에게 보여줬다.
국내로 컴백. 그 무대는 수원 삼성.
구단과 경기출장문제로 갈등하고 있던 서정원에게 수원과 안양에서 영입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경기에 나서질 못하던 서정원에게 국내복귀를 요청한 것. K리그 외에도 일본과의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던 탓에 일본 J리그에서도 계속된 러브콜이 오고 있었다. 아직 유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서정원은 국내 복귀는 생각하고있지 않았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미래가 불투명했고, 운동장에서 뛰고싶어 하던 서정원은 결국 국내복귀를 결심. 원 소속팀인 안양을 뒤로하고 1년 후 해외이적을 보장한 수원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그 후 또 다른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당시 50:50으로 받은 이적료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안양 LG측에건 것이다.(결국 LG와의 법정소송에서 패소하고 만다.)
99년 수원에 입단한 서정원은 1년간 프랑스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K리그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자신이 기량미달로 퇴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정규리그 선두를 달리는데 주역이었던 서정원은 전남과의 홈 경기에서 부상으로 한동안 경기에 나서질 못했고, 재활훈련도중 십자인대가 파열되면 복귀는 점점 늦어져만 갔다. 수원에서 1년간 활약 후 유럽진출을 추진하던 계획도 결국 무산되었고, 서정원의 선수생명은 이제 끝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와 그를 더욱 답답하게 했다.
1년 간의 재활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라운드에 복귀했지만 몸 상태는 예전 같지 않았고, 당연히 예전 기량이 나오지 않았다. 선수생명이 끝났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또다시 한물갔다는 표현으로 그의 부진에 답했다.
이렇게 끝나는가 싶더니 2001년 다시 화려한 부활. 수원 삼성 블루윙스의 푸른 날개가 되어가고 있었다. 팀의 아시안클럽챔피언쉽과 아시안 슈퍼컵에 우승에 기여하며 당당히 MVP를 차지. 그동안의 불신들을 일축시켰다. K리그에서도 득점랭킹 상위권에 들 정도로 활약 또한 대단했다.
클럽에서의 맹활약과 달리 대표팀에서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부상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무서운 신예들이 서정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클럽과 대표팀을 오가는 사이 히딩크 감독은 서정원의 부상 방지를 위해 휴식차원에서 선발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후 대표팀 명단에서 '서정원'이란 이름은 볼 수 없었다. 결국 2002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선수가 아닌 해설자로서 월드컵을 지켜보고 말았다.
만족스러웠던 수원생활. 하지만 더 큰 꿈을 위해.
수원은 오른쪽은 서정원의 몫이었다. 제2의 서정원을 꿈꾸며 수원에 입단한 촉망받는 윙플레이어 이종민(22.울산)도 서정원이란 벽을 넘지 못하고, 2군에 머물거나 간간히 교체 출장에 그칠 정도로 수원에서 서정원의 활약은 컸다.
프로다운 철저한 자기관리로 10년이상 어린 후배들과의 경쟁에서도 지지 않으며 2004시즌 수원을 K리그 우승으로 이끈 후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한다. 2005년 2월 수원의 플레잉 코치직을 뒤로하고 유럽행을 선언.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유럽에서 정리하며 지도자로서의 출발을 위해 그가 택한 곳은 오스트리아 1부 잘츠부르크에 입단. 플레잉 코치로서 계약을 체결했다.
잘츠부르크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보이던 서정원에게 다른 구단에서 영입제의가 들어왔다.
2부리그에서 1위로 1부리그로 승격한 SV 리트. 리트구단의 체계적인 시스템과, 구단의 적극적인 영입제의에 감동 받은 서정원은 리트로 이적을 결심. 다시 플레잉 코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SV 리트에서의 활약은 잘츠부르크에서의 활약 이상이었다.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팀내 득점 2위를 기록 할 정도로 최고의 활약을 펼쳐 오스트리아 유력 일간지 ‘쿠리어’가 서정원을 '올해의 최고 선수'로 선정하기도 했다.
유럽의 작은 리그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서정원의 골 소식이 계속 들려오자 팬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지던 '서정원' 이란 이름이 다시 떠올라 어느새 대표팀에 포함시키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호적상 만 35세이지만 실제로는 1969년생. 한국나이로는 37세. 동기들은 물론 후배들까지도 은퇴하는 상황에서 서정원은 유럽에서의 활약으로 '은퇴'란 단어는 잊어버린 듯 하다.
나쁘다는 것은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철저한 몸 관리로 '빠른 선수는 단명한다'는 축구계의 속설을 불식시키며 여전히 최고의 선수 '영원한 날쎈돌이' 서정원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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