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김남일

생년월일 : 1977년 3월 14일

신장 : 181cm   체중 : 75kg

포지션 : DMC

등번호 : 5

출신교 및 클럽 : 부평고 - 한양대 - 전남 
                  - 엑셀시오르(NED) - 전남 - 수원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한 미드필더 유망주.
93년 인천의 축구명문 부평고에 입학한 김남일은 1년 후배인 서기복(26. 인천), 안효연(27.수원)과 함께 무적 부평고를 이끌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부평고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한양대에 입학한 김남일은 96년 U-19 청소년대표로 선발. 이란과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6년 만에 한국팀이 우승을 차지하게된다.


97년 말레이시아에서 치러지는 세계대회 출전티켓을 확보하게됐으나 U-20 명단에 김남일은 없었다. 역대 최강의 전력이란 평가속에 말레이시아로 떠난 대표팀은 베니 멕카시(28.포루투)가 활약하던 남아공과 0:0. 앙리(28. 아스날), 트레제게(28. 유벤투스) 투톱의 프랑스에 2:4로 패하며 마지막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16강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 '쿠칭쇼크' 브라질의 아다일톤(28.베로나)에게 한 경기 득점 신기록인 6골을 허용하며 팀은 3:10으로 패하며 예선탈락 하고 만다.(매번 청소년 대표팀이 결성될 때마다 역대 최강이라는 평가를 내리지만 당시 경기내용으로 보나 선수 개개인의 능력은 96-97 청대 멤버가 역대 최강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계속된 대표팀과의 인연. 그리고 포지션의 변화.
97년 쿠칭쇼크와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부진. 한국축구의 위기감이 감돌았고, 한국축구는 젊은 선수 위주의 올림픽 대표팀을 결성해 올림픽 체제로 들어간다. 당시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었던 허정무 감독은 98년 10월 올림픽 상비군을 발표한다. 한양대 3학년 김남일. 그의 이름도 올라와 있었고, 12월 방콕에서 벌어지는 아시안게임에 대표팀에 선발. 예선 2차전에 후반 교체투입. 자신의 역사적인 첫 A매치 출전을 기록하게된다.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올림픽 아시아 1차예선에 참가한 김남일은 부상에서 회복한 고종수(27.전남)와 97년 U-20 에이스 이관우(27.대전)가 합류하면서 그의 입지가 줄어드는 듯 했다. 그 후에도 서기복(27.인천), 박지성(24. 맨체스터 U)등이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며 점점 포지션 경쟁이 과열됐고, 김남일은 자신의 장점인 강한체력과 몸싸움을 살릴 수 있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된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한 김남일은 대표팀 주장 김도균(28. 성남)과 함께 중원을 장악하며 또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온 국민의 관심을 받고 치러진 일본과의 U-23 평가전. 한.일 축구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선수들이라 더욱 많은 관심을 받고 평가전이 펼쳐졌다. 99년 9월 일본에서 벌어진 1차전. 허정무 감독은 김남일에게 일본의 플레이 메이커 나카타 히데토시(28.볼튼)를 봉쇄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나카타 H.에게 번번이 뚫리며 결정적인 찬스를 내주고 말았고 결국 1:4 참패의 주범으로 지목 받게 된다. 이 경기로 인해 그는 팬들과 언론의 집중적인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최종예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완패라 팬들의 충격은 더욱 컸기 때문에 비난은 더욱 거셌고 이 22살 유망주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비난이었다.

 

매번 외치는 공한증을 탈출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중국, 중동의 신흥강호 바레인과 펼쳐진 올림픽 최종예선에서 3승 1무의 기록으로 최종예선에 통과. 김남일의 마음은 벌써 시드니행 비행기에 가 있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 또한 감출 수 없었다.

 

파란눈의 시선. 그리고 다시 찾아온 기회.
2000년 12월 한 외국인이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거스 히딩크. 잇단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한국축구를 구하기 위해 온 남자. 그 해 12월 일본과의 평가전 관람 후 2001년 1월 히딩크가 결성한 첫 대표팀이 출범한다. 그러나 김남일은 없었다. 대표팀의 각종 대회 참가와 전지훈련을 하는 동안 김남일은 K리그에 전념했다.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 생각하고 K리그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한편 대표팀에선 위기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컨페더레이션컵에서 프랑스에게 0:5로 패하고 만 것이다. 3년 만에 또다시 0:5 스코어. 멕시코와 호주와의 경기에서 승리해 위기를 넘기는 듯 했으나 히딩크 감독은 대표팀에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계속된 선수발굴에 여념이 없던 코칭스텝의 발길은 K리그와 대학경기로 쏠렸다. 대표팀의 수석코치 핌 베어백의 눈에 들어온 김남일. 결국 2001년 7월. 대표팀에 전격합류. 1년 만에 다시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다.

 

유럽 전지훈련 중 치러진 네덜란드 클럽들과의 평가전에서 무난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팀 사정으로 합류하지 못한 유상철(34.울산)의 공백을 매꿨다. 그러나 거기까지. 또다시 비난과 질타가 빗발치기 시작한다.

 

2001년 8월 15일 광복절. 체코와의 A매치. 전반을 0:1로 뒤지며 마치긴 했지만 전반전의 경기내용은 만족할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후반 20분경 김남일의 결정적인 미스로 인해 2번째의 골을 허용한 이후 한국팀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팀은 또다시 0:5의 패배를 하고만다. 프랑스에게 0:5로 패한지 2개월이 조금 넘은 시점이라 그 충격은 더욱 컸다. 히딩크 경질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김남일은 이 경기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지목 받기 시작하면서 팬들과 언론은 그를 빼야한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의 김남일에 대한 신뢰는 계속됐다. (그 당시 나 역시도 우선 김남일부터 빼고 시작해야 한다고 했었다.)

 

 충격의 유럽 전지훈련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대표팀은 계속된 평가전으로 강력한 팀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세네갈, 나이지리아, 크로아티아를 홈으로 불러들여 실력을 쌓아 나갔고 김남일은 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서 승리의 쐬기를 박는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2:0 승리로 이끌었으나 김남일에 대한 평가는 차갑기만 했다.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한 홀딩맨.
2002년 1월.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미국으로 향한다. 월드컵에서 한국과 같은 조에 속해있는 미국에서 개최되는 골드컵에 초청국 자격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골드컵에서도 한국은 미국과 한 조에 편성되어 조예선 첫 경기가 펼쳐졌다.

최진철(34.전북)의 퇴장과 랜던 도노반(23.LA)의 첫 골로 미국은 앞서나갔으나 송종국(26.수원)의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1:1로 균형을 이뤄가고 있었다. 수적 불리함으로 인해 한국은 계속 밀리는 경기내용을 펼쳤고 종료직전 다마커스 비즐리(23.PSV)에게 결승골을 허용. 팀은 1:2로 패하게 된다.

 

팀은 패했지만 김남일의 활약은 눈부셨다. 1명이 빠진 상황에서 중원에서 탁월한 수비능력을 보이며 체코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한국은 미국에게 패하고 쿠바에게 비기는 등 부진한 경기내용을 펼쳤지만 한국선수 중 유일하게 대회 베스트 11에 선발될 정도로 그의 기량이 일취월장하기 시작했다.

 

골드컵이 끝나고 불안하기만 했던 한국팀의 전력은 마지막 유럽 전지훈련을 통해 서서히 정상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월드컵 개막 전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의 평가전에 완벽한 한국팀의 색깔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남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는 1:0으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정확한 패스로 박지성(24.맨체스터 U)에게 공을 연결하며 박지성의 득점을 도왔고, 프랑스 최고의 스타 지네딘 지단(33.R.마드리드)에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100%이상 소화해 내며 더 이상 예전의 김남일이 아니라는 걸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월드컵 개막 후 완벽한 중원 봉쇄로 상대팀 공격을 무력화시키며 이제는 대표팀의 중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탈리아전 부상이후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도 출전을 강행했지만 또다시 부상을 당하며 더 이상 경기를 뛸 수 없었다. 


다시 돌아온 K리그. 이제는 최고의 스타로. 그리고 해외무대 도전.
월드컵이 끝나고 대표팀 선수들은 각 구단으로 복귀를 했다. 또한 선수들의 해외진출이 하나, 둘씩 성사되기 시작한다. 언론에선 대표팀 선수들의 해외 러브콜을 계속 보도했고, 김남일도 예외는 아니었다.(확실치 않은 내용에 대한 언론의 급물살, 러브콜, 초읽기 시리즈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시기였다.) 터키 알타이스포르에서 영입제의가 오는 등 그의 유럽진출은 시간문제라는 시각이었고, 김남일 또한 빅리그의 교두보로 터키를 삼겠다고 할 정도로 터키행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전남 측에서는 빅리그라면 이적료 없이도 보낼 수 있지만 터키행 보다는 김남일의 역량을 더 키워 빅리그로 진출하도록 돕겠다며 터키진출을 만류. 결국 김남일은 구단과 시즌을 마치고 해외이적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K리그에 돌아온 김남일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가 뛰는 경기에는 홈,원정을 불문하고 많은 관중들이 몰리며 그의 인기를 실감 할 수 있었다. K리그에서의 활약은 월드컵때의 기량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가 경기장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K리그 제2의 부흥이 올 거라 생각했었다.

 

시즌이 마치고 전남구단과 김남일은 해외이적을 추진. 그러나 계속된 루머뿐 정식적인 영입제의를 해오는 팀은 없었다. 결국 김남일은 직접 유럽으로 날아간다. 그의 첫 행선지는 축구종가 잉글랜드. 그의 첫 유럽도전. 웨스트 햄에서 입단테스트를 받는다. 그러나 좋지 못한 테스트 평가를 받았고, 웨스트 햄 또한 이미 수비형 미드필더 리 보이어를 영입한 상태. 사전에 구단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에이전트의 능력으로 인해 또 한번 유럽진출이 좌절되고 만다.






유럽행의 의지가 강했던 만큼 김남일은 또 다른 행선지를 찾는다. 다음 목적지는 히딩크의 나라. 송종국이 당시 활약하던 페예노르트로 향한다. 그곳에서 계속된 입단테스트.

 

그러나 반 마르비크 감독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페예노르트는 엑셀시오르에서 5개월간 임대후 이적협상을 제의했다. 조금 더 지켜보겠다는 얘기. 내키지 않는 조건들이었다. 페예노르트 구단은 임대료 없이 월봉 2만5천 유로를 제시했다. 탐탁치않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구단은 이를 수락. 해외진출을 보장하겠다는 김남일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김남일의 유럽진출은 이뤄지는 듯 했다. 하지만 자신의 첫 유럽무대인 엑셀시오르의 팀 전력은 형편없었다. 김남일의 플레이를 받쳐줄만한 선수도 없었고, 자신의 플레이를 100% 펼칠 수 없는 구단이었다. 폐예노르트는 시즌 종료 전 아무런 계약에 대한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김남일은 국내로 돌아와야만 했다. 비록 조기복귀 하기는 했지만 6개월간 유럽축구를 경험하고 돌아온 그는 탁월한 수비능력에 공격력을 배가시켜 한층 업그레이드 된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있었다.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로.
김남일. 이제 한국축구에 가장 필요한 축구선수가 됐다. 2004 올림픽 와일드 카드 선발에서도 1순위로 꼽힐 만큼. 그의 중원장악능력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아시안컵이 끝나고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한 김남일은 피로골절로 또다시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하고 2004 시즌마저 접어야 했다.

2005시즌 김남일은 당시 수원에서 활약하던 고종수(27.전남), 조병국(24.성남)과 1:2로 트레이드 되며 수원의 유니폼을 입게된다. A3 대회와 K리그 슈퍼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등 그의 수원생활의 시작은 훌륭했다. 하지만 또다시 발목을 붙잡는 부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복귀는 점점 늦어져만 간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유망주에서 한국축구의 미운오리새끼로. 지금은 한국축구의 가장 필요한 선수로. 이제 한국축구에 꼭 필요한 퍼즐의 한 조각이 되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Posted by 공차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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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황선홍
생년월일 : 1968년 7월 14일
신장 : 183cm  몸무게 : 79kg
별명 : 황새
포지션 : FW
등번호 : 18
출신교 및 클럽 : 용문고 - 건국대 - 포항 - 레버쿠젠AGER) -
부퍼탈(GER)  
포항 - 세레소(JPN) - 수원 
- 가시와(JPN) - 전남


스무 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대학교 2학년 때 황선홍이 속한 건국대가 대학축구연맹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1988년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A매치 첫 데뷔전은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 일본전. 데뷔전에서 멋진 헤딩골을 넣으며 화려한 A매치 신고식을 치렀다.

그 후 90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 개막 전 최대 다크호스로 평가받던 한국은 잇단 졸전으로 3전 전패의 수모를 당하며 예선탈락하고 만다. 하지만 한국은 황선홍이 있어 4년 후를 기약할 수 있었고, 이에 부응하듯 황선홍은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첫 번째 시련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건국대를 졸업한 황선홍은 홍명보와 함께 당시 드래프트를 거부. 독일로 축구유학을 떠난다. 그의 독일 첫 무대는 레버쿠젠 아마추어팀. 제2의 차범근을 목표로 도전한 독일무대에 도전을 시작했다.

첫 시즌 나름대로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그 다음해 2부리그 부퍼탈로 이적. 이적 후 불의의 부상을 당하며 힘든 독일생활을 정리하고 국내복귀를 결심. 결국 국내로 돌아와 93년 포항의 유니폼을 입게된다.

 
94 미국월드컵 시련의 시작.
93 최종예선 월드컵 예선에서 처음으로 일본에게 패하는 등 당시 아시아에 배정된 2장의 티켓을 따내기란 쉽지 않았다. ‘도하의 기적’으로 힘겹게 최종예선을 통과한 대표팀은 1994년 미국으로 향한다. 한국팀의 상대는 무적함대 스페인, 월드컵 예선 홈 경기에서 브라질을 격파한 볼리비아, 그리고 지난 대회 우승팀 독일. 어느 한 팀 만만한 팀이 없었다. 김호 감독의 1-4-4-1 전술에서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맡았던 그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 월드컵 한국팀의 1호 골의 주인공이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대표팀의 첫 상대였던 스페인. 전반 초반 스페인 수비수 나달의 퇴장으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으나 결과는 2:2 무승부. 한국팀으로선 선전한 경기였으나 황선홍 무득점에 그치고 만다. 이 경기에서 1:1 찬스를 놓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골을 넣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볼리비아전에 나서야만 했다. 결국 볼리비아 전에서도 잇단 실수로 경기 결과 0:0. 이날 승리를 하게되면 16강 진출을 90%이상 확정짓는 상황이어서 더욱 아쉬웠고. 그 경기에서 많은 실수를 범한 황선홍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야 말았다.

 16강 진출을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인 독일과의 경기에서 0:3으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 첫 골을 뽑아냈으나 팀은 2:3으로 패. 결국 16강을 다음 대회로 미뤄야만 했다. 대표팀의 선전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황선홍은 온갖 비난에 시달리며 그의 시련은 계속되고 있었다.

                            월드컵 독일과의 경기에서 득점장면.

 

 부활. 그러나 그를 붙잡는 부상으로 또다시 좌절...
월드컵이 끝난 후 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의 맹활약, K리그 8경기 연속골 등 미친 듯이 골을 넣으며 다시 황선홍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당시의 황선홍은 유고(現세르비아 몬테네그로)용병 라데 보그다노비치와 함께 완벽한 호흡으로 상대편 골문을 유린, 전 구단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황선홍-라데 라인은 K리그 역대 최고의 투톱으로 평가받고 있다.)

 황선홍의 폭넓은 움직임과 라데의 파괴력 있는 돌파와 결정력이 휼륭한 조화를 이루며 다시 한번 골게터로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시켰다. 하지만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부상과 그에 대한 편견은 여전했다.

96 아시안컵 이후 부상으로 신음하며 K리그와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97년 1월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 없는 대표팀을 이끌어야 했다. 그의 부상회복만을 기다렸으나 황선홍은 결국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 단 한 경기도 참가하지 못하고 만다.

 98년 3월 다시 대표팀에 복귀한 황선홍은 4월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감각적인 시저스 킥으로 극적인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프랑스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또 유럽의 강호 체코와의 경기에서 맹활약. 황선홍-최용수 투톱은 합격점을 받았고, 월드컵 16강은 더 이상 꿈이 아닌 듯 했다. 하지만 프랑스 출국직전 가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상대팀 골키퍼와의 충돌로 인해 또다시 부상.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팀의 패배와 사상초유의 월드컵본선 현지에서의 감독경질을 바라만 봐야했다.


                        98년 일본 평가전에서의 득점장면.

 

갑작스런 해외진출. 그 무대는 일본.


 
황선홍이 아무리 골을 넣어도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황선홍 자신도 뭔가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껴 선택한 것이 일본행.(어쩌면 일본을 상대로 많은 골을 넣어 자신을 인정해주는 일본 프로리그에서 뛰었는지도 모른다.) 
 

98 프랑스 월드컵이 끝나고 J리그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 99년 J리그에서 24골을 기록.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성공적인 일본생활을 해 나갔다. J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건 J리그의 수비가 느슨해서 득점하기 쉬웠다고 펌하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다음해 수원과 전남이 황선홍 영입에 나섰고 국내 복귀를 결심해 2000년 수원 유니폼을 입는다. 하지만 그가 뛴 경기는 한 경기. 곧바로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했던 샤샤와 트레이드형식 임대로 가시와 레이솔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그곳에서 홍명보, 유상철과 함께 다시 H-Y-H 라인을 가동하며 가시와 레이솔을 상위권으로 이끌었다.

 마지막 무대를 위하여.
J리그와 대표팀을 오가며 맹활약하던 황선홍은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직전 합류. 1년 2개월만에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다. 한국은 프랑스에게 0:5로 패하며 조별예선통과에 실패했지만 황선홍은 멕시코, 호주전에서 골을 기록하며 브론즈슈(득점3위)를 수상.‘대표팀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황선홍’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후 J리그와 대표팀에서 꾸준한 활약을 보였고, 히딩크의 감독 파워프로그램도 젊은 선수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충실히 수행해내며 월드컵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최종엔트리에 자신의 이름은 당당히 올린 황선홍은 월드컵 개막직전 '월드컵 종료 후 대표팀 은퇴'를 선언. 많은 사람들이 그의 대표팀 은퇴를 아쉬워했다.

 2002 월드컵. 한국팀의 첫 경기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이을룡(30.트라브존)의 어시스트를 받아 선제골을 뽑아내며 팀은 2:0승. 월드컵 첫승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는 상대팀 수비수와 충돌하며 눈썹 윗부분이 찢어지고 말았고, 붕대를 감은상태에서 다시 경기장에 들어서는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2승1무의 예선 성적으로 16강에 진출.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A 메치 100경기 출장을 달성과 함께 설기현(26. 울버햄튼)의 극적인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한국팀이 월드컵에 4강에 진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황선홍은 그간 자신을 항상 따라다니던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명예롭게 대표팀에서 은퇴할 수 있었다.(그 해 11월 브라질과의 A매치로 황선홍과 홍명보의 은퇴경기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던 시련...
월드컵 기간동안 진통제를 맞아가며 경기에 출장한 탓에 황선홍은 또다시 부상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소속팀 가시와 레이솔은 이미 홍명보의 포항복귀와 유상철의 유럽진출 선언으로 전력약화를 가져오며 가시와의 순위는 점점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결국 가시와는 황선홍의 부상복귀를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방출을 결정. 한동안 무적상태로 새로 뛸 팀을 알아보기도 했다. 터키에서 영입제의가 들어왔으나 계약기간 1년 이상을 제시한 트라브존과 6개월을 주장한 황선홍은 결국 계약협상 결렬. 그 후 전남에 입단했으나 그의 부상은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선수로서 은퇴. 지도자의 길로 그의 새로운 축구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도 대표팀 경기에서 골대 위를 훌쩍 넘기는 슈팅을 날릴 때면 생각나는 이름이 있다. '황선홍' 1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했고, 미국 월드컵 당시 나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이 나라 대표팀의 스트라이커로 살 수 있어 행복했었다고......




Posted by 공차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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