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젋고 어린 축구 선수가 있었다. 이 어린 선수는 변변치 않는 팀에서

조차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더구나 실력또한 아무런 가능성이 없

었다.


어느날 한 사람이 자신의 팀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어떤 축구

선수라도 감히 쳐다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놀라웠다. 하지만 소년은

이러한 그의 시선을 알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다름아닌 자신에게 향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놀라운 인물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너를 내 팀에 데려갈거다,"


소년은 믿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그런말

을 한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주변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재능이 없는 저런 선수를 데

려가려고 하는 것일까..이 같은 의문에 그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잔말하지 말고, 지켜봐라, 언젠가는 우리를 이끌 선수가 되어 있을거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어느새 그 소년은 자신의 팀을 이끌고 세계최고의 무대인 월드컵에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승리를 목전에 둔 4강전..상대는 브라질

이었다. 브라질...말 할것도 없이 해가지지 않는 영원한 축구의 나라...

이 이상 강한 적은 없다..


하지만 감독은 경기전 인터뷰에서 자신있게 말 하였다.


"브라질의 축구는 존경하지만 우리팀에는 그가 있기에 브라질뿐만이 아

니라 그 어떤팀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 어린선수는 그분의 예언대로 조국을 이끄는 위대한 선수로 변해있었다.


.

.

.

.

.

.

 

이 보잘것 없고 재능이 없던 선수의 이름이 바로 "데니스 베르캄프" 였다 

'축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벨 네드베드  (0) 2011.01.09
로베르토 바죠 에 대한 말.말.말.  (0) 2011.01.09
펠레의 저주  (0) 2011.01.08
축구의 신은 있다.  (0) 2011.01.08
터키전이 끝나고 난 후.  (0) 2011.01.08
Posted by 공차는아이
,

이름 : 이동국


생년월일 : 1979년 4월 29일


신장 : 185cm   체중 : 80kg


포지션 : FW


출신교 및 클럽 : 포철공고 - 포항 - 베르더 브레멘

(GER) 
- 포항 - 상무 - 포항 



10대 반란 그 화려한 시작.

포철공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동국은 서울에서 개최되는 U-19 아시아 선수권대회에 대표선수로 선발된다. 2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대회로 2살 아래의 이동국이 선발됐다는 자체로 주목받기 충분했다. 이관우(27.대전), 양현정(28.대구)등 공격진의 틈 속에서 출장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지만 벤치에서 그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세계대회 최종 엔트리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2년 후를 기약해야만 했다. 


고교 3학년이 되자. 고교무대를 평정. 더 이상 고교무대에 이동국의 적수가 없었다. 많은 대학에서 스카웃제의가 들어왔고, 연고구단인 포항에서도 해외 축구유학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계속된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대학과 프로를 놓고 고심 끝에 당시 황선홍이 활약하던 포항구단을 선택. 당시로선 이른 나이에 프로생활을 시작한다.(지금이야 고교 졸업 후 프로행을 선택하는 선수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고교-대학-프로’ 형태가 거의 보편적이었다.)


98년 포항에 입단한 이동국은 아주대를 졸업하고 부산에 입단한 안정환(29.뒤스부르크), 프로 3년차 고종수(27.-)과 함께 프로축구를 인기스포츠로 끌어올렸고 황선홍과 짝을 이뤄 아시안클럽챔피언쉽에서 우승. 포항의 2연패를 이끌었다.

 

차범근 감독의 선택 98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 발탁.

97년. 고교도 졸업하지 않은 한 소년이 월드컵 상비군에 발탁되었다. 포철공고 3학년 이동국.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리며 조금씩 유명세를 타더니 K리그에서도 맹활약하며 98년 4월 예비엔트리 발탁. 그해 5월 자메이카전에 후반 79분 투입되면서 자신의 첫 A매치를 기록하게된다. 평가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이동국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

과연 최종엔트리에 포함될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차범근 감독은 과감히 이동국을 최종엔트리에 포함시킨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17살의 호나우두(29.R.마드리드)가 그랬듯이 한국축구의 미래라 불리던 어린 이동국에게 경기에는 출전하진 않아도 월드컵의 경험을 얻게 하는 것도 훗날 한국팀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발탁한 것이다.



또다시 예선탈락. 그러나 희망을 보다.

프랑스에 도착한 월드컵 대표팀은 1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 사활을 건다. 황선홍이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자 차범근감독은 황선홍, 최용수(33.FC서울) 투톱의 3-5-2대신 김도훈(34.성남)을 원톱으로 하는 3-6-1로 멕시코전을 치른다. 양팀 모두 조심스러운 경기운영을 펼치던 중 하석주가 프리킥으로 월드컵 출전사상 최초로 선제골을 뽑아내며 승리를 확신하는 듯 했다. 그러나 아드레날린이 과한 탓이었을까? 골을 기록했던 하석주는 곧바로 백태클로 퇴장명령을 받고 그라운드를 떠난다. 그 후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내리 세 골을 허용하면서 1:3으로 패. 다음경기인 네덜란드와의 경기에 총력을 기울어야만 했다.

 

최용수-김도훈 투톱의 3-5-2로 네덜란드를 맞은 한국팀은 계속된 실점으로 0:3으로 벌어지고 차범근 감독은 결국 후반 33분. 이동국을 서정원(36.SV 리트)과 교체시키며 이동국에게 월드컵에서 뛸 기회를 줬다. 교체되자마자 강력한 중거리슛과 헤딩슛으로 네덜란드 수비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이동국의 대인마크를 지시했다. 팀은 결국 0:5로 패하고 말았고, 한국팀은 예선 2패로 탈락이 확정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동국의 15분간의 활약에 희망을 보았고, 다음 월드컵의 대 활약을 예고하는 듯 했다. 

K리그의 부흥, 개인최고의 해 1998년.

많은 사람들이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참패로 한국축구의 암흑기를 예상했지만 대표팀 선수들이 소속팀에 복귀하고, 이동국, 안정환, 고종수등 신세대 스타들의 활약으로 K리그는 예상외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된다. 98시즌 K리그는 사상최초 200만 관중을 돌파하는등 리그출범이후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리그 중반 펼쳐진 올스타게임에서도 2골 1도움으로 선배들을 제치고 올스타 MVP차지했으며, 그해 10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치러진  U-19대회에서 우승과 대회 득점왕을 차지하며 환상적인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K리그 우승까지 노려봤으나 포항이 울산에게 덜미를 잡히며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이동국은 안정환과 치열한 경쟁 끝에 신인왕을 차지. 98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그러나 계속된 혹사.

K리그가 끝나고 그 해 12월. 방콕으로 날아가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이동국은 99년 1월 호주 전지훈련과, 던힐컵 참가 후 99년 4월 나이지리아 U-20 대회에 참가한다. 계속된 강행군으로 정상 컨디션이 아닌 상황에서 세계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당시 조 편성은 포르투갈, 우르과이, 말리. 당시 언론에서는 역대최강의 전력에 최상의 조편성이라며 4강도 가능하다고 난리법석이었으나 1승2패로 예선 탈락하고 만다.(당시 조예선 최약체라고 평가하던 말리는 그 대회 4강까지 진출한다.)


나이지리아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이동국은 곧바로 올림픽 1차예선에 참가한다. 1차 예선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는등 맹활약 후 곧바로 K리그에 투입된다. K리그 중반 다시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해 일본과의 평가전을 가진후 올림픽 최종예선에 투입되는 강행군이 계속됐다. 중국, 바레인과 한조에 편성된 한국은 신병호(29.경남)의 골로 중국에서 첫승을 거둔뒤 승승장구 3승1무로 최종예선을 통과하게 된다.


올림픽이 개최되는 2000년. 1월에 올림픽 대표팀은 호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호주 4개국 초청 대회에 참가 후 곧바로 A팀에 합류해 미국으로 향한다. 골드컵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서 황선홍의 패스를 받아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선제골을 터트리며 A매치 첫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팀은 2:2로 무승부를 기록. 결국 2000년 골드컵 우승팀이었던 캐나다와 골,득실까지 동률이 되자. 추첨으로 8강 진출팀을 가리게 됐고, 한국은 아쉽게 탈락하고 만다.


올림픽 최종예선 - 호주 - 미국등 쉴새없이 경기에 투입되다보니 이미 몸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 결국 몸에 이상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릎부상을 안고 계속 경기에 투입된 상태라 부상 정도가 심각해 올림픽 엔트리에 포함되는것조차 힘든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올림픽 대표팀 스트라이커는 ‘이동국’ 이라며 결국 최종엔트리에 부상중인 이동국을 포함시킨다. 

올림픽 본선에서 만난 상대는 당시 시드니 올림픽 2,3위를 차지한 스페인과 칠레, 그리고 아프리카의 복병 모로코와 한조에 편성됐다. 1차전 애들레이드서 스페인과의 경기 경기내내 무기력한 플레이를 펼친 한국팀은 스페인에게 0:3의 완패를 당하고 만다. 남은 두 경기를 모두 이겨야 8강진출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

 

예선 2차전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 3차전 칠레와의 경기에서 8강 진출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칠레가 스페인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혼전상태.

 

한국은 당시 칠레에게 대량득점을 얻어야만 8강진출을 바라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최철우(29.부천)의 슛이 수비수 몸을 맞고 나오자 이동국이 이 공을 낚아채 골대 구석에 멋지게 찔러 넣으며 1: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지루한 경기끝에 더 이상의 득점은 나오지 않았고, 1:0의 승리로 2승1패로 역대 올림픽 출전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지만 예선 탈락하고 만다.


올림픽이 끝나고 제대로 된 휴식한번 취하지 못하던 이동국은 아픈 무릎을 이끌고 레바논으로 향한다. 아시아 최고의 팀을 가리는 아시안컵 엔트리에 또다시 이동국을 포함 시킨것. 붕대로 칭칭 감은 무릎으로 6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지만 경기가 끝난 후면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로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이동국이 득점왕을 차지하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한국팀은 3위를 기록. 또다시 대회 우승을 차지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무리한 유럽진출 시도 . 그리고 계속되는 부상.

아시안컵이 끝나고 독일로 재활을 떠난 이동국에 대한 소문이 국내에 떠돌기 시작했다. 분데스리가의 명문팀들과 잉글랜드, 이탈리아의 클럽에서 이동국을 영입을 원한다는것. 아시아 최고의 골잡이를 영입하겠다는 팀이 나서자 에이전트는 정상적인 몸상태도 아닌 이동국을 영입하려는 팀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적극적인 구단은 독일 분데스리가의 베르더 브레멘. 재활을 위해 독일에 도착한 이동국을 눈여겨본 베르더 브레멘은 이동국 영입에 나섰고, 6개월간 임대 후 이적조건을 포항에게 제시했다. 축구협회의 끈질긴 설득과 이동국의 해외진출을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포항의 약속을 지킴으로서 이동국의 유럽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몸상태가 좋지않은 상황에서 입단해 경기에 투입하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이었고, 당시 평범한 성적을 기록하던 베르더 브레멘의 주전 스트라이커 였던 아일톤(32.함부르크) 과 피사로(28. 바이에른 뮌헨)가 이동국의 입단 이후 위기감을 느꼈는지 미친 듯이 골을 넣기 시작하면서 이동국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7경기 출전이라는 초라한 기록을 남기고 시즌을 마치고 말았다. 하지만 브레멘측은 이동국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며 임대계약 연장을 원했다. 하지만 포항구단은 이를 거부하며 그의 첫 유럽생활은 이렇다할 기록을 남기지 못하며 끝나고 말았다.

 

초라하게 국내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대표팀에서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히딩크 감독은 계속해 이동국을 소집명단에 포함시켜 테스트 했다. 아직 다 낳지 않은 상황에서 히딩크가 원하는 강인한 체력을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2002 월드컵 엔트리 탈락. 생에 첫 좌절.

월드컵의 해 2002년. K리그 휴식을 마치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던 선수들에게 다시 대표팀 소집된다. 북중미 골드컵에 참가를 포함한 미국 전지훈련. 계속된 좋지않은 평가를 받던 이동국은 자신이 A매치 첫골을 넣었던 미국땅에서 다시한번 부활하리라 다짐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대표팀이 경기내내 무기력한 플레이를 펼치고 있었고, 이동국 또한 결정적인 득점찬스를 몇 번 놓치는등 부진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골드컵에서 4위로 마친 대표팀은 곧바로 우르과이로 향한다. 우르과이와 A매치에 출장한 이동국은 미국 전지훈련과 별반 다를게 없는 플레이를 펼치자 언론에서 엔트리 탈락 명단에 이동국을 넣기 시작한다.

 

결국 부상으로 히딩크가 원하는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하며 최종 엔트리에서 이동국의 이름은 빠지고 만다. 4년전 19살의 어린 나이에 무너져 가던 한국축구에 한줄기 희망이 되어주던 그의 엔트리 탈락은 본인 뿐만 아니라 그를 응원하던 팬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대표팀이 승승장구하며 4강에 진출할때까지 눈물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아시안게임 동메달. 그리고 군입대.

월드컵이 끝나고 축구협회는 박항서 감독을 아시안 게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고 U-23 대표팀을 구성한다. 박항서 감독은 부상에서 회복됐다는 판단아래 이동국을 선발.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로 기용한다. 처음으로 대표팀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던 이동국은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고, 다른 선수들도 당시 금메달을 획득하면 군 면제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어느때보다 선수들의 의지는 대단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만난 이란과의 경기에서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펼쳐 나갔지만 골 운이 따르지 않아  0:0 무승부를 기록하였고, 승부차기에서 이영표(29. 토튼햄)의 실축으로 결국 패하며 동메달을 획득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아시안 게임이 끝나고, 이동국은 변화가 필요하단 생각에 군입대를 결심하게 된다. 군 입대를 결정하게 된 후 인터넷에서는 안티들의 활동이 더 활기를 치기 시작했다.(‘X동국 당신의 군입대를 축하합니다.’라는 플랜카드를 경기장에서 펼친 사진이 돌기도 했다.)

 

2003년 3월 상무에 입단한 이동국은 몸 상태가 완전치 않은 상황이었고, 히딩크 감독의 후임으로 선임되었던 움베르토 코엘류 대표팀 감독의 부름을 받았지만 자신의 장점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만다. 하지만 상무에 입대하게 된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는지, 그동안 팬들 사이에서 안뛴다던 평가를 받던 그의 플레이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폭 넓은 움직임을 바탕으로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 주는 능력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광주 상무의 주전스트라이커로서 K리그에서 맹활약 하기 시작했다. 

 

다시 떠오른 본프레레의 황태자.

대표팀의 계속된 졸전으로 코엘류 감독이 해임되었고, 그의 후임으로 네덜란드 출신 본프레레 감독이 선임된다. 한국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대표팀 선발에 착수 했고, 한동안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던 이동국도 대표팀 명단에 포함된다.

 

대표팀에 다시 선발되어 참가한 아시안컵. 4년전 아시안컵에 참가해 팀은 3위를 기록했지만 이동국은 대회 득점왕에 오르며 유럽진출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대회였다. 이동국은 이 대회에서 다시 부활해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를 원했다. 매 경기 골을 기록하며 다시 팀을 우승으로 이끌것으로 예상했으나 8강에서 만난 이란과의 경기에서 3:4로 패하며 대회 우승과 득점왕을 모두 놓치고 만다. 하지만 아시안컵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리며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이동국 이라는 인식을 다시 새겨 놓았다.

 

아시안컵이 끝나고 본격적인 월드컵 예선준비체제로 들어간 대표팀은 2차 예선에서 고전하며 힘들게 최종예선에 진출하게 된다. 한국은 최종예선에서 사우디, 쿠웨이트, 우즈베키스탄과 한 조에 편성되었고, 무난한 조편성이라는 평가속에 예선통과는 낙관적이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독일 대표팀이 아시안 투어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해 대표팀과 평가전을 가지게 되었다. 1:1상황으로 진행되던 상황에서 이동국은 멋진 터닝 발리슛을 하였고, 세계최고 골키퍼로 불리던 올리버 칸(36. 바이에른 뮌헨)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골을 터트리며 최종예선에 대활약을 예고했다.

 

2005년 2월 쿠웨이트와의 최종예선 1차전.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이끌어 나가던 대표팀은 이동국의 호쾌한 발리슛으로 다시 득점을 올리면서 승기를 잡았고, 후반 이영표(29. 토틑햄)의 추가골로 2:0승리를 거뒀다. 그 후 사우디에게 2패를 기록하긴 했으나 최종전적 3승1무2패로 조2위로 독일행 티켓을 거머쥐게 된다.

 

 

본프레레 경질. 흔들리는 위상?

월드컵 예선동안 사우디에게 패하는등 조금씩 흔들리던 대표팀은 2005년 8월 홈에서 치러진 동아시아컵에서 중국과 북한에게 무승부를 기록하였고, 마지막 경기였던 일본에게 0:1로 패하면서 최하위를 기록하게 된다. 무엇보다 가장 문제되었던건 경기내용도 엉망이었지만 선수에 대한 테스트가 거의 없었고, 경기내내 단조로운 전술로 일관하면서 팬들의 질타를 받기 시작했다.

 

결국 본프레레 감독은 중도하차하게 되었고, 새로운 네덜란드 출신 감독인 딕 아드보카트를 U.A.E에서 대려온다. 아드보카드 감독이 부임하면서 모든 상황은 원점으로 되돌아갔고, 주전 스트라이커로서 입지를 굳건히 지키던 이동국은 다시한번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아드보카트 감독 부임 후 첫 평가전이었던 이란과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에서 이동국만한 스트라이커를 아직 못봤다고 할 정도로 조금씩 아드보카드 감독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의 경기에 골을 기록하며 자신을 계속 기용해준 신임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두차례의 평가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아드보카트감독으로부터 ‘한국에서 이동국보다 훌륭한 스트라이커를 못봤다’ 라는 호평속에 2006년 1월 전지훈련 멤버로 발탁. 평가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2006 독일월드컵 주전스트라이커 자리를 예약했다.

 

또다시 월드컵 발목을 잡는 부상.

2006 K리그가 개막되고, 4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는등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던 이동국. 너무 몸이 가벼웠던 탓이었을까? 포항에서 벌어진 인천과의 경기에서 그만 무릎부상을 당하고 만다. 무릎부상 후 2~3주면 완치가 가능하고, 한달 후 경기에 뛸 수 있을거란 낙관론이 언론으로부터 흘러 나왔지만 이동국의 부상상태는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시 의료진은 수술을 권유했고, 약물치료로라도 월드컵에 참가하겠다는 이동국의 의지는 강했다. 결국 주변의 만료끝에 세계최고의 재활치료 시스템을 갖춘 독일에서 최종 진단을 받기로 결심한다.

당시 이동국이 뛸 수 있는 확률은 10%.

독일에 도착한 이동국은 곧바로 검사에 들어갔고, 독일의 의료진은 월드컵 출전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8년을 기다린 월드컵을 눈 앞에서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한편 대표팀은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동국 없는 대표팀으로 바꿔야만 했다. 핌 베어백 수석코치는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조재진(25.시미즈)의 플레이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다른 이동국의 대체카드를 찾는데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동국 없이 대표팀을 구성된 대표팀은 독일로 향했고, 1차전 토고와의 경기에서 승리하고, 프랑스와 무승부를 거두는등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인해 0:2로 패하면서 16강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8년을 기다린 월드컵. 하지만 2010년 월드컵이 있어 행복하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그라운드를 누비고 싶어하던 이동국은 결국 관중석에서 바라봐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있어 그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리는 4년 후 라이온 킹의 땅 아프리카에서 포효하는 라이온 킹 이동국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공차는아이
,

이름 : 서정원

생년월일: 1970년 12월 17일

신장 : 172cm  체중 : 68kg

포지션 : AMR/AML

출신교 및 클럽 : 거제고 - 고려대 - 안양 - 상무 -

안양 -
스트라스부르(FRA) - 수원 - 잘츠부르크

(AUS) - 
SV 리트(AUS)


뒤늦게 시작한 축구.
중학시절 축구선수였던 형을 따라 시작한 축구. 타고난 재능이었을까? 끊임없는 노력이었을까? 남들보다 뒤늦게 축구를 시작했지만 고교시절 그를 따라 올만한 선수는 없었다. 폭발적인 스피드, 화려한 개인기, 정확한 골 결정력 등을 바탕으로 1986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선수권에서 팀의 우승과 함께 11골로 득점왕을 수상했다.(헤트트릭 2회를 기록하며 아직도 대회 기록으로 남아있다.)

 

고교 NO.1 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리던 서정원은 거제고 졸업 후 고려대에 입학을 하기로 결정한다. 고려대에 입학한 서정원은 당시 최연소로 대표팀 골키퍼에 선발되기도 했던 김봉수, 천재 플레이 메이커 김병수와 함께 1학년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학 최고의 스타로 올라섰다. 그런 서정원을 지켜봐온 당시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회택감독은 서정원을 예비엔트리에 포함시킨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참가한 한국팀 개막 전 지난 대회에서의 선전과 아시아 예선을 최고의 성적으로 통과해 대회 다크호스로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본 결과 역시 세계축구와의 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결과는 3전 전패. 선배들이 무기력하게 예선 탈락하는 모습을 지켜본 서정원은 4년 후를 기약한다.



본격적인 스포트라이트 U-23 올림픽대표 선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축구종목에 출전 연령제한이 시작됐다. 23세 이하의 선수들만이 참가할 수 있게된 것. 69년 7월1일 이후의 출생자들로 연령을 제한. 김봉수,신범철,정재권,이임생,강철,노정윤,김병수,신태용등 지금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스타들과 함께 올림픽예선에 참가한다.

축구협회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8강이상의 진출을 목표를 위해 68년 독일의 크라우천 청소년대표팀 감독 선임이후 24년만에 외국인 감독을 선임한다. 그 주인공은 일본대표팀의 기술고문을 맡아 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디트마르 크라머.

 

당시 미우라가 이끄는 일본과, 장진, 하오하이동의 중국을 꺾고 32년 만에 자력으로 올림픽에 진출하게된다. 32년 만에 자력으로 올림픽 티켓을 따낸 대표팀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한 스페인 올림픽 대표팀과의 대결에서 2:3으로 아쉽게 패하는 등 나날이 향상된 경기력을 보이며 본선에서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본선에서 만난 모로코, 파라과이, 스웨덴과 한 조에 편성된 한국은 우세한 경기력을 펼치고도 모로코, 파라과이와 무승부를 기록. 마지막 스웨덴과의 경기만 남아있었다. 토마스 브롤린이 이끌던 스웨덴은 조에서 가장 강한 상대. 반드시 승리해야만 8강 진출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전반에 서정원이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뜨리며 골키퍼와 1:1찬스를 맞았고, 가슴 트레핑으로 골키퍼를 제친 후 골을 성공. 한국이 1:0으로 앞서나가며 8강 진출에 희망을 갖게했다. 하지만 결국 후반 실점하며 또다시 무승부를 기록 3무승부로 조3위를 기록. 조예선 탈락하고 만다.

 

스웨덴 경기가 끝나고 외신 기자들이 서정원에게 인터뷰를 요청할 정도로 서정원은 올림픽 스타가 되었고, 올림픽이 끝난 후 스페인 명문 바르셀로나, 발렌시아등에서 영입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그의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프로무대 시작. 유럽? K리그?
대학 4학년이던 91년.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당시 올림픽대표팀 총감독이었던 크라머 감독의 추천으로 분데스리가 진출을 추진하고 있었다. 베르더 브레멘, 바이에른 레버쿠젠등 분데스리가 명문팀들이 영입에 나섰고 서정원은 그렇게 유럽에 진출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서정원은 병역미필상태.

 

당시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던 안양의 끈질긴 러브콜과 군문제로 결국 분데스리가 진출을 포기하고 K리그 드래프트를 신청한다. 서정원이 드래프트를 신청하기만을 기다리던 리그 최하위 안양이 드래프트 1순위로 서정원을 지목. 그의 첫 프로생활은 유럽무대가 아닌 국내에서 시작하게 됐다.

마음은 유럽에 가 있어서였을까? 대표팀에서의 맹활약과 달리 K리그에서의 활약은 신통치 못했다. 92년부터 안양에서 뛰기 시작했지만 97년 아디다스컵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것 외에 프로리그에서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첫 월드컵 출전. 그리고 첫 득점.
힘겹게 아시아 최종예선을 통과한 한국은 스페인, 볼리비아, 독일과 한 조에 편성됐다.
예선 1차전 스페인과의 경기. 해외 언론은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졸전과 예선을 힘겹게 통과한 한국을 조 최하위로 평가하고 있었고, 스페인 감독은 경기전 한국을 5:0으로 꺾겠다고 할 정도로 당시 한국팀의 전력을 하향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고, 스페인 수비수 나달의 퇴장으로 수적으로 우세해진 한국은 스페인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우세한 경기내용을 보였지만 전반을 0:0으로 마감해야만 했다. 후반들어 파상공세를 펼치던 한국은 스페인의 역습 두 번에 모두 골을 허용하며 0:2로 뒤지고 말았다. 김호감독은 공격적인 전술을 위해 홍명보를 중앙으로 올리고, 체력이 떨어진 스페인 수비라인을 휘젓기 위해 서정원을 김주성과 교대하며 투입시킨다. 후반 투입된 서정원은 빠른 돌파로 스페인 수비를 교란하기 시작했다.

 

경기종료 6분을 남기고 홍명보의 프리킥이 골로 연결되며 한국팀은 기적을 연출할 준비가 됐었고, 경기종료직전 홍명보의 패스를 받은 서정원이 강력한 슈팅으로 동점골을 성공. 2:2 무승부의 기적을 연출했다.

 

 

스페인과 2:2 무승부의 선전을 기록한 한국은 볼리비아와의 대결에 강한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볼리비아와 경기에서 선발 출장한 서정원은 오른쪽 측면에서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빠른발을 이용해 볼리비아 수비진을 농락했고, 몇 차례의 슈팅은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곤 했다. 경기는 0:0 무승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처럼 예선 2경기를 모두 비기면서 마지막 독일과의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16강에 진출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전반에 내리 3골을 허용하며 포기하는 분위기 였으나 한국은 놀라운 투혼으로 후반 2골을 만회하며 독일을 끝까지 몰아부쳤지만 결국 2:3으로 패하며 2무1패로 예선 탈락하고 만다.

 

유럽무대 도전. 계속된 엇갈림.
94 미국 월드컵을 참가하며 유럽선수들과 기량을 겨룬 서정원은 유럽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커졌다. 상무에서 제대를 하고 안양에서 K리그생활을 하며 유럽 진출을 기다리던 서정원에게 입단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적제의가 들어온 곳은 포르투갈의 축구명문 벤피카. 서정원은 곧바로 포르투갈로 날아간다. 


그곳에서 입단을 확정짓고 백넘버9번의 유니폼까지 한국으로 갖고 왔으나 벤피카 측에서 최종예선 차출을 유보하자는 계약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당시 전력이 급성장한 일본과 베일에 가려진 구 소련연방의 팀들로 월드컵 진출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회와 차범근 감독은 이를 거부하며 이적동의서 발급을 거부했고, 그의 유럽행은 또다시 멀어져만갔다.

 

결국 한동안 유럽행을 포기하고, 월드컵 최종예선에 집중한 서정원은 일본과의 최종예선 원정경기에서 0:1로 뒤지던 상황에서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동점을 만들었고, 역전승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일본과의 원정경기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한국팀은 승승장구했고, 최종예선을 조1위로 가뿐히 통과했다.

 

그 후 분데스리가 FC쾰른에서의 영입제의. 안양은 서정원을 붙잡고 싶던 마음이 더 컸는지 이번에는 이적료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구단의 반대했다. 서정원은 자신이 받기로 한 이적료 50%를 포기하겠다고 할 정도로 유럽진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끝내 구단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고, 결국 또다시 무산되고 말았다.

 

계속된 도전 끝에 97년 12월. 결국 프랑스 리그1 스트라스부르에 입단하게 된다. 리그 첫 경기부터 조금은 어색한 27번을 달고 경기에 출전한 서정원은 데뷔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며 눈부신 데뷔전을 치뤘다. 그 후 팀을 리그강등에서 탈출을 시키는데 성공하며, 프랑스에 '쎄오' 열풍을 일으켰다.


아쉬운 98 프랑스 월드컵. 그리고 유럽 생활의 위기.
프랑스에서의 성공적인 데뷔로 월드컵에서 서정원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대표팀은 당시 유럽에서 활약하는 서정원과 노정윤(34.울산)을 합류시키며 16강 진출을 목표로 대비를 했으나 황선홍의 부상과 서정원이 수두로 합류가 늦어지면서 많은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1차전 멕시코와의 경기. 수두로 인해 컨디션 난조로 서정원은 후반 25분 투입됐고, 한국은 하석주의 선제골을 지키지 못한 채 1:3의 패배를 당하고 만다.

2차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한 서정원은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네덜란드 수비진을 몇차례 교란시켰으나 네덜란드는 강했다. 0:5의 스코어가 말 해주듯 한국팀은 참패를 당하고 만다. (경기가 끝난 후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팀에서 이동국(26.포항)과 서정원을 인상적인 선수로 꼽기도 했다.)

 

예선전적 2패로 예선탈락이 확정된 한국은 1승이라도 거두고 돌아가기 위해 차범근 감독까지 경질하고, 3차전 벨기에와의 경기에 나선다. 90분간 벨기에 골문을 위협했으나 룩 닐리스와 유상철(34.울산)이 한 골씩 넣으며 1:1 무승부. 1무 2패로 첫 승은 다음 대회로 미뤄야만 했다.


98-99시즌 서정원에 대한 팀의 기대는 대단했다. 처음 달던 배번인 27번에서 서정원이 좋아하던 11번으로 바꿔줄 정도로 팀의 기대는 컸다. 또한 스트라스부르 시내에 대형광고판에 서정원의 얼굴이 나갈 정도로 스트라스부르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밋빛 인생으로 보이던 그의 프랑스 생활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르로이 단장과 만코프스키 감독체제로 바뀌게 된 것. 만코프스키 감독은 당시 부임하면서 데려온 선수들을 중용하면서 좀처럼 서정원은 경기에 나서질 못했고, 몇 달째 경기에 나서지 못하자 서정원은 단장에게 해외구단으로 이적을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거절당했다.

 

한편 스트라스부르의 리그순위는 점점 강등권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팀의 형편없는 리그순위를 지켜본 서포터들은 팀의 핵심맴버로 꼽히던 서정원을 계속 출장시키지 않자 빗발치는 항의가 계속되기 시작했고, 당황한 구단 측은 결국 서정원을 다시 경기에 투입시킨다.

 

4개월만에 경기에 나선 서정원은 팀이 0: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반 종료직전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자신이 왜 경기에 뛰어야만 하는지 구단 관계자들에게 보여줬다.

 

국내로 컴백. 그 무대는 수원 삼성.
구단과 경기출장문제로 갈등하고 있던 서정원에게 수원과 안양에서 영입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경기에 나서질 못하던 서정원에게 국내복귀를 요청한 것. K리그 외에도 일본과의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던 탓에 일본 J리그에서도 계속된 러브콜이 오고 있었다. 아직 유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서정원은 국내 복귀는 생각하고있지 않았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미래가 불투명했고, 운동장에서 뛰고싶어 하던 서정원은 결국 국내복귀를 결심. 원 소속팀인 안양을 뒤로하고 1년 후 해외이적을 보장한 수원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그 후 또 다른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당시 50:50으로 받은 이적료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안양 LG측에건 것이다.(결국 LG와의 법정소송에서 패소하고 만다.)


99년 수원에 입단한 서정원은 1년간 프랑스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K리그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자신이 기량미달로 퇴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정규리그 선두를 달리는데 주역이었던 서정원은 전남과의 홈 경기에서 부상으로 한동안 경기에 나서질 못했고, 재활훈련도중 십자인대가 파열되면 복귀는 점점 늦어져만 갔다. 수원에서 1년간 활약 후 유럽진출을 추진하던 계획도 결국 무산되었고, 서정원의 선수생명은 이제 끝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와 그를 더욱 답답하게 했다.

1년 간의 재활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라운드에 복귀했지만 몸 상태는 예전 같지 않았고, 당연히 예전 기량이 나오지 않았다. 선수생명이 끝났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또다시 한물갔다는 표현으로 그의 부진에 답했다.

 

이렇게 끝나는가 싶더니 2001년 다시 화려한 부활. 수원 삼성 블루윙스의 푸른 날개가 되어가고 있었다. 팀의 아시안클럽챔피언쉽과 아시안 슈퍼컵에 우승에 기여하며 당당히 MVP를 차지. 그동안의 불신들을 일축시켰다. K리그에서도 득점랭킹 상위권에 들 정도로 활약 또한 대단했다.

 

클럽에서의 맹활약과 달리 대표팀에서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부상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무서운 신예들이 서정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클럽과 대표팀을 오가는 사이 히딩크 감독은 서정원의 부상 방지를 위해 휴식차원에서 선발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후 대표팀 명단에서 '서정원'이란 이름은 볼 수 없었다. 결국 2002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선수가 아닌 해설자로서 월드컵을 지켜보고 말았다.

 

만족스러웠던 수원생활. 하지만 더 큰 꿈을 위해.
수원은 오른쪽은 서정원의 몫이었다. 제2의 서정원을 꿈꾸며 수원에 입단한 촉망받는 윙플레이어 이종민(22.울산)도 서정원이란 벽을 넘지 못하고, 2군에 머물거나 간간히 교체 출장에 그칠 정도로 수원에서 서정원의 활약은 컸다.

 

프로다운 철저한 자기관리로 10년이상 어린 후배들과의 경쟁에서도 지지 않으며 2004시즌 수원을 K리그 우승으로 이끈 후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한다. 2005년 2월 수원의 플레잉 코치직을 뒤로하고 유럽행을 선언.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유럽에서 정리하며 지도자로서의 출발을 위해 그가 택한 곳은 오스트리아 1부 잘츠부르크에 입단. 플레잉 코치로서 계약을 체결했다. 


잘츠부르크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보이던 서정원에게 다른 구단에서 영입제의가 들어왔다.

 

2부리그에서 1위로 1부리그로 승격한 SV 리트. 리트구단의 체계적인 시스템과, 구단의 적극적인 영입제의에 감동 받은 서정원은 리트로 이적을 결심. 다시 플레잉 코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SV 리트에서의 활약은 잘츠부르크에서의 활약 이상이었다.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팀내 득점 2위를 기록 할 정도로 최고의 활약을 펼쳐 오스트리아 유력 일간지 ‘쿠리어’가 서정원을 '올해의 최고 선수'로 선정하기도 했다.

 

유럽의 작은 리그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서정원의 골 소식이 계속 들려오자 팬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지던 '서정원' 이란 이름이 다시 떠올라 어느새 대표팀에 포함시키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호적상 만 35세이지만 실제로는 1969년생. 한국나이로는 37세. 동기들은 물론 후배들까지도 은퇴하는 상황에서 서정원은 유럽에서의 활약으로 '은퇴'란 단어는 잊어버린 듯 하다.
나쁘다는 것은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철저한 몸 관리로 '빠른 선수는 단명한다'는 축구계의 속설을 불식시키며 여전히 최고의 선수 '영원한 날쎈돌이' 서정원으로 불리고 있다.

 

Posted by 공차는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