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첫 출전한 한국대표팀은 그 후 번번히 예산탈락의 고배를 마시다 1964년 동경올림픽 본선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성적을 안고 돌아와야만 했고, 그 후로도 번번히 예선통과를 하지 못한 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하기까지 24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서울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소련과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또다시 예선탈락의 아픔을 맛봐야 했고, 4년후를 기약해야만 했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IOC는 축구 종목은 U-23 선수들로 연령을 제한하였고, 한국은 28년만의 자력 진출을 위해 U-23 대표팀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 후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5회연속 자력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고, 수많은 스타들이 U-23 올림픽 대표팀을 거쳐가게 됐다.

 

그래서 U-23 대표팀이 처음 결성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부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 중 올림픽 예선과 본선 당시 최고의 활약을 펼치던 선수들로 베스트 11을 구성해보고자 한다. 포메이션은 올림픽 대표팀의 주 포메이션이었던 3-5-2로 선발 하였다.

 

- GK -

                               서동명(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생년월일 : 197454

신장 : 196cm

소속팀 : 울산 - 전북 - 울산 - 부산

1995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이 결성됐을 당시 알고 있던 선수는 94 미국월드컵에 출전한 조진호와 이운재, 그리고 청소년 대표시절부터 촉망받는 수비수로 평가받던 박철 뿐 이었다. 이운재와 조진호는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상황이었고, 박철은 부상으로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당연히 주전 GK는 미국월드컵 당시 독일과의 경기에 출전했던 이운재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전혀 알지 못하던 키큰 골키퍼가 등장해 놀라운 선방을 하기 시작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서동명.

 

그 후 이운재와 주전 경쟁을 하기 시작했고, 당시 한 경기씩 교대로 출전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의 예상과는 달리 이운재는 매 경기 실점을 하는 방면 서동명은 눈부신 선방을 펼치며 비쵸베츠 감독의 눈에 들게 되었고, 올림픽대표팀 주전 GK 자리를 확보하며, 올림픽 예선과 본선에서 눈부신 선방을 펼치게 된다. 특히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가나와의 경기에서는 윤정환의 페널티킥으로 앞서나간 이후 가나의 파상 공세를 서동명의 선방으로 한 골을 지켜내 48년만의 첫 승을 올리는데 일등공신이 된다. 서동명과 함께 2000 시드니 올림픽의 김용대, 2004 아테네 올림픽의 김영광도 올림픽 당시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올림픽 대표시절의 서동명은 단연 최고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 DF -

 

김현수(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생년월일 : 1973214

신장 : 176cm

소속팀 : 전남 - 전북

성남과 인천, 대구에서 활약하며 A팀에도 이름을 올렸던 김현수가 아닌 1996 애틀란타 올림픽 주전 수비수 김현수다. 비쵸베츠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을 맡은 이후 수 많은 수비수들이 테스트를 받았지만 김현수의 자리를 위협하진 못했다. 180cm 이상의 장신선수를 선호하던 비쇼베츠 감독은 거의 모든 경기에 김현수를 투입하며 무한 신뢰를 보냈다. 수비수로서 신장은 작았지만 넓은 활동량, 뛰어난 대인마크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올림픽 대표 시절에도 큰 부상없이 꾸준한 활약을 보였으며, 1995년 전남에 입단해 프로생활을 시작한 이후 안정적인 선수생활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1998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이후 후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대표팀의 호출은 없었지만 K리그에서 대표 수비수로 평가받았고, 2001K리그 올 해의 수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동기들이 하나, 둘씩 은퇴를 하는 상황에서도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으로 전북 수비형 미드필더와 스토퍼로 활약. 최근 은퇴를 하고 전북의 코치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상헌(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생년월일 : 19751011

신장 : 184cm

소속팀 : 안양 - 인천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 수비수. 장신에 힘이 좋아 아시아 예선 당시 제공권 싸움에서 이상헌을 이길 수 있는 아시아 선수는 없었다.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헤딩골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 후 본선에서도 이임생, 이경춘 같은 와일드 카드가 선발되어도 최종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며 좋은 활약을 펼치게 된다.

 

동국대 졸업 후 드래프트에서 안양의 지명을 받아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안양 입단 이후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K리그에서는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하면서 소속팀과 대표팀 관계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1998년 차범근 감독에 눈에 들면서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였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게 된다. 하지만 매 시즌 부상들 달고 생활을 하다보니 프로선수로서 꾸준한 활약을 하지 못했고, 인천에서 방출된 후 신갈고 코치를 맡고 있다.

 

 

조병국(2004아테네올림픽)

생년월일 : 198171

신장 : 181cm

소속팀 : 수원 - 전남 - 성남 - 베갈타 센다이(JPN)

2004년 아테네 올림픽팀 수비라인의 리더. 2000U-19 시절부터 박용호, 임유환과 함께 강력한 수비라인을 구축했으며 아테네 올림픽까지 함께 했다.(임유환은 올림픽 예비엔트리) 강력한 대인마크와 높은 점프력을 바탕으로 공중볼에서도 상대 공격수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2004아네테 올림픽 최종예선 무실점을 기록했다.

 

청소년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2003년에는 A팀에 선발되어 주전 수비수로도 활약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 상태에다가, 와일드카드로 유상철까지 합류하면서 주전 자리마저 위협받았고 아시아 예선당시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팀을 8강에 진출시켜놓으며 2006월드컵 대표팀 주전을 예약하는 듯 했다. 하지만 전남에서의 트레이드, 다시 성남으로의 이적, 부상 후유증으로 K리그에서 제대로 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대표팀에서 조병국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핌 베어백 감독시절 잠깐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만 당시 김진규-강민수 라인을 중용하던 베어백 감독은 조병국을 기용하지 않았고, 부상까지 겹치면서 그 후 대표팀과의 인연은 점점 멀어였다. 대표팀과의 인연은 멀어졌지만 K리그에서는 최고의 센터백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소속팀 성남을 상위권으로 이끄는 수비의 핵으로 자리잡았다. AFC챔피언스리그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 현재 베갈타 센다이로 이적.

 

 

- RWB -

 

 

이기형(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생년월일 : 1974928

신장 : 181cm

소속팀 : 수원 - 성남 - 서울 - 오클랜드 시티(NZL)

1996 애틀란타 올림픽 부동의 오른쪽 윙백. 1993U-20 세계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주목을 받았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의 핵심멤버로 활약했다. 측면에서 화려한 드리블이나 크로스는 없었지만 안정된 수비력과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종종 득점을 올리면서 비쇼베츠 감독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큰 부상이 없다면 오른쪽 윙백의 자리는 항상 이기형의 자리였다. 98,02 월드컵에 참가한 최성용이 백업멤버로 뛸 정도로 이기형의 자리는 확고했다. 96애틀란타 올림픽에서도 팀이 111패를 기록하는 동안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예선 마지막 이탈리아와의 경기에는 1:0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동점골을 기록하기도 했다.(하지만 추가 실점으로 8강진출 실패)

 

올림픽대표 이후 A팀에서도 동기들중 유일하게 선발되어 96아시안컵에 참가할 정도로 국내감독들도 이기형을 신임하였고, 98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항상 백업멤버에 머물렀던 최성용이 급성장하면서 다시 한번 둘의 대결구도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차범근 감독은 당시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던 최성용을 최종 엔트리에 합류시키면서 월드컵의 꿈은 멀어져갔다. 그 후에도 최성용, 박진섭, 송종국등 뛰어난 오른쪽 윙백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대표팀과의 인연은 멀어졌다. 대표팀과의 인연은 멀어졌지만 K리그에서는 뛰는 팀마다 오른쪽 풀백의 자리는 이기형의 자리였다.

 

이 자리를 놓고 이기형과 박진섭을 놓고 상당히 고민을 했었으나 내 손은 결국 본선에서 좀 더 좋은 활약을 보여준 이기형의 손을 들어 주었다.

 

- LWB -

 

이영표(2000년 시드니 올림픽)

생년월일 : 1777423

신장 : 177cm

소속팀 : 안양 - PSV 에인트호벤(NED) - 토트넘(ENG) - 도르트문트(GER) - 알 힐랄(KSA)

청소년대표 경력도 없는 건국대 소속의 이영표가 1999년 처음으로 올림픽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 그 후 올림픽2차예선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이며 당시 올림픽대표팀 감독이었던 허정무감독의 신임을 얻기 시작하였고, 그해 6A팀에 선발돼 코리아컵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코리아컵 이후에도 왼쪽 자리에서 이영표를 위협할만한 선수는 나타나지 않았고, 올림픽 최종예선에서도 오른쪽의 박진섭과 함께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중국을 따돌리고 올림픽 티켓을 확보하였다. 박진섭이 뛰어난 수비력과 정확한 크로스로 상대팀을 위협했다면 이영표는 박집섭과는 반대의 스타일로 박진섭처럼 수비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수비와 활발한 오버레핑으로 올림픽 대표팀에서 최고의 왼쪽 윙백으로 활약했다.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스페인에게 0:3으로 패할 당시 골키퍼 김용대와 함께 유이하게 제몫을 해준 선수로 해외 언론으로부터 평가받기도 했다.

 

올림픽 이후에도 A팀 왼쪽풀백은 이영표의 자리이며, 2002월드컵 이후 에레디비지에 진출과 EPL,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등 유럽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사우디 알 힐랄로 이적 팀을 상위권으로 이끌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으나 계약 만료 후 유럽 이적과 은퇴를 놓고 고심중이다.96애틀란타 올림픽의 박충균이나 04시드니올림픽의 김동진 같은 좋은 왼쪽 윙백들이 있지만 올림픽 예선과 본선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이영표가 조금 앞서지 않았나 생각된다.

 

- MF -

윤정환(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생년월일 : 1973216

신장 : 173cm

소속팀 : 부천 - 세레소(JPN) - 성남 - 전북 - 사간도스(JPN)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 최고의 플레이 메이커. 윤정환의 양질의 패스로 올림픽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 최용수에게 많은 득점 찬스를 만들어줬다. 96애틀란타올림픽 최종예선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핵심멤버로 평가받았고, 비쇼베츠 감독은 윤정환을 대체 불가능한 선수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올림픽 본선 가나와의 경기에서도 황선홍이 얻어낸 패널티킥을 성공시키며 팀의 1:0 승리를 이끄는등 올림픽 8강의 기대감을 한층 높였지만 마지막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패하며 8강 진출은 실패하고 말았다. 올림픽 이후에도 소속팀 부천SK에 복귀해 니폼니쉬 감독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주축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쇼베츠 이후 A팀 감독들은 윤정환을 반쪽짜리 선수로 평가하며 대표팀 선발에 회의적인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98프랑스월드컵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2002.일월드컵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지만 단 1분도 출전하지 못하고 그의 국가대표팀 경력을 마감했다. 이 자리도 노정윤, 고종수같이 좋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들이 많았지만 올림픽대표팀에서의 활약은 윤정환이 가장 나았다고 생각된다.

 

 

이천수(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생년월일 : 198179

신장 : 174cm

소속팀 : 울산 - 레알 소시에다드(ESP) - 울산 - 페예노르트(NED) - 수원 - 전남 - 알 나스르(KSA) - 오미야(JPN)

와일드 카드 출전선수를 제외하고 최태욱과 함께 유이하게 2회 연속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최고의 재능으로 평가받던 부평고 3학년 이천수는 시드니올림픽대표팀에 합류하게 된다. 평가전과 올림픽 예선에서 조금씩 출전을 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만다. 자신보다 4~5살 많은 선배들과 함께 당당히 본선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올림픽 2차전 모로코와의 경기에서는 자신의 패널티킥을 골키퍼가 막아내자 이를 다시 차넣으며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선 3차전 칠레와의 경기에서는 보복성 플레이로 퇴장을 당하면서 올림픽 8강에 대한 꿈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했다.

 

4년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팀의 막내였지만 2004아테네올림픽에서는 팀의 주축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대표팀의 에이스 박지성이 아시아 최종예선에 참가했지만 소속팀 PSV의 차출거부로 올림픽 본선에 참가할 수 없었고, 이천수가 팀을 이끌어 나가야했다. 올림픽 대표팀은예선에서 좋은 활약과 약간의 운도따르면서 8강에 진출했고,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면 4강진출까지 노릴수가 있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3골을 허용하며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혼자 두골을 넣으며 맹추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2:3패배를 당하며 8강 진출에 만족해야했다.

 

팀은 패했지만 이천수는 대회기간내내 최고의 활약을 보여줬다. 올림픽대표 이후에도 2회연속 월드컵대표에 선발되는등 승승장구 하였으나 계속된 해외진출 실패와 K리그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서 팬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하였고, 얼마전까지 사우디리그에서 활약하였으나 급료문제로 팀을 나와 J리그로 이적.

 

 

서정원(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생년월일 : 19701217

신장 : 173cm

소속팀 : 상무 - 안양 - 스트라스부르(FRA) - 수원 - 잘츠부르크(AUS) - 리드(AUS)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의 주전스트라이커. 노정윤, 정재권, 이임생, 신태용등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지만 대표팀의 에이스는 서정원이었다.

 

올림픽 1차예선에서 많은 득점을 올렸고, 친선대회에서도 많은 골을 기록했지만 정작 최종예선에서는 골이 터지질 않았다. 중국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최종예선에서의 부진을 털어낸 서정원은 올림픽 본선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고, 본선 3차전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자신의 장점인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선제골을 기록하며 유럽 빅클럽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안양의 끈질긴 구애로 안양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 후 19981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이적 꿈에 그리던 유럽진출에 성공했고, 첫 시즌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프랑스에서 쎄오 열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 시즌만에 수원으로 국내리그 복귀, 2002월드컵대표 탈락하고 말았다. 수원과의 계약기간 만료 후 다시 유럽으로 날아간 서정원은 오스트리아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올림픽 대표시절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활약했고, 서브 포지션으로 측면에 섰지만, 국가대표팀에서는 주로 오른쪽과 왼쪽의 측면공격수로 활약했다. 최태욱과 마찬가지로 서정원도 중앙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계속 활약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워낙 뛰어난 선수라 측면에서도 잘해줬지만 중앙이 더 어울렸을 것 같은 선수. 최고의 활약을 보인 11명을 뽑다보니 이천수와 마찬가지로 주 포지션이 아닌 측면 미드필더로 선발하게 됐다.

 

- FW -

 

최용수(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생년월일 : 1973910

신장 : 184cm

소속팀 : 안양 - 상무 - 안양 - JEF이치하라(JPN) - 주빌로(JPN) - 교토(JPN) - 서울

대한민국 역대 스트라이커중 가장 탁월한 결정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던 스트라이커 최용수. 올림픽대표 시절부터 뛰어난 활약을 보인 최용수는 주전스트라이커 맹활약하며 96애틀란타 올림픽 본선으로 이끌었다.

 

올림픽 본선에서는 대표팀 주전스트라이커 황선홍이 합류하면서, 최종예선에서 함께 활약하던 우성용이 탈락했고, 황선홍으로 인해 최용수의 올림픽대표팀 내에서의 입지도 줄어드는 듯 했다. 하지만 최용수의 입지는 줄어들지 않았고, 본선에서도 주전으로 경기에 출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최용수는 본선과 인연이 없었다. U-20 세계대회에서도 무득점을 기록했던 최용수는 애틀란타 올림픽 본선에서도 무득점을 기록했고, 98프랑스월드컵, 2002대한민국 월드컵에서도 부진한 활약으로 큰 대회에 약한 단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K리그와 J리그에서 놀라운 득점력을 선보였고, 결정력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의 선수로 불리우다 은퇴. K리그 최연소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고 있다.

 

 

이동국(2000년 시드니 올림픽)

생년월일 : 1979년 4월 29일

신장 : 185cm

소속팀 : 포항 - 베르더 브레멘(GER) - 포항 - 상무 - 포항 - 미들스브로(ENG) - 성남 - 전북

역대 최연소로 1998프랑스월드컵에 참가한 이후 승승 장구. 각급 대표팀에 모두 선발될 정도로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다. 시드니올림픽 대표팀이 구성된 이후 부상이나 A팀 호출이 없는 이상 항상 올림픽대표팀 명단에서 이동국의 이름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올림픽대표팀에서의 입지는 절대적이었다.

 

두 살 위의 형들과의 경쟁에서도 절대 우위를 점하며 올림픽 대표팀 주전스트라이커로 활약. 올림픽예선과 각종 대회에서 고비때마다 득점과 도움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올림픽대표팀에서는 최전방과 쉐도우 스트라이커를 맡았고, 심지어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될 정도로 허정무 감독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절대적 신임이 독이 되고 말았고, 부상을 앉고 시드니올림픽출전을 강행. 예선 3차전 칠레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승리로 이끌었으나 1차전 스페인에게 0:3으로 패한 것이 화근이 되어 21패를 기록하고도 팀은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올림픽이 끝나고 곧바로 아시안컵 대표팀에 합류 대회 득점왕을 기록하였지만 무릎부상을 달고 무리하게 출전을 하다보니 몸 상태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유럽무대에 진출하였으나 고질적인 부상과 슬럼프로 인해 유럽무대에서는 실패를 맛보았고, 성남으로 이적. 하지만 성남에서도 이렇다할 활약없이 전북으로 이적해 생에 최초 득점왕과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당시 각급 대표팀에서 이동국의 팀내 입지가 절대적이다보니 무리하게 출장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혹사로 이어져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아쉬운 선수. 만약 지금의 지동원이나 기성용처럼 대표팀 선발에 있어서 조율이 가능했다면 지금도 훌륭하지만 좀 더 나은 이동국의 모습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글을 마치며.

이렇게 올림픽대표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11명의 선수를 선발해봤다. 1988년 서울올림픽때부터 올림픽 축구를 봐왔지만 선수선발 연령이 제한된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때부터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지금도 관심을 갖고 있는 대회중 하나다. 23세 이하의 선수들이 출전을 하다보니 미래의 스타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과거 올림픽을 보면서 이 선수가 곧 스타가 될거라 예상하고, 딱 맞아떨어졌을때의 기분은 뭔가 모를 뿌듯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우리에게 기쁨도 주고, 좌절도 안겨주었던 올림픽 앞으로 1년후의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본인이 선발한 11명의 선수들보다 더 뛰어난 선수들로 구성된 올림픽팀을 기대한다.

Posted by 공차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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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차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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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이런글을 쓰게 되었는데 종종 축구팬들 사이에서 부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안양LG의 연고이전을 논쟁하는 것 같아서 좀 더 심층적인 토론을 위해서 안양LG 연고이전 진행과정을 기사를 바탕으로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오래전에 lost상암님이 네이버 블러그에 연고이전의 진행과정을 정리하고 링크를 청부하여 글을 써주신적이 있는데 현재는 lost상암님의 링크가 다 깨져있는 상황이라서 사실 여부가 힘들어 져서 제가 다시 링크를 걸어놓았습니다. 여기에는 링크가 걸려있지 않지만 첨부자료에 워드 파일을 올려놓았습니다. 링크가 궁금하신분은 다운 받아서 보길 바랍니다.

사월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신 분들은 이 아픈 역사를 잘 알고 있겠지만 새롭게 유입된 축구팬들은 연고이전의 과정을 정확하게 알기 힘들거라 생각이 듭니다. 연고이전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세요. 글이 긴 관계로 관심 없으신 분들은 패스 부탁듭니다.


안양LG구단의 연고이전 진행 과정

이 글은 안양LG구단의 연고이전을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진행 과정을 구성한 자료이며 FC서울의 연고이전에 대한 토론을 진행함에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토론이 진행될 수 있도록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자료입니다. 진행 상황 묘사는 날짜 별로 표기를 하였고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각 문장마다 자료의 출처를 밝히는 링크를 첨부합니다. 이 글을 만드는데 ‘LOST상암님’의 글과 네이버 블로거로 활동하시는 ‘때릴꺼야 (csv092)’님의 글을 참조했음을 밝힘이다.

2002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각 지역 월드컵 구장들은 각 프로 구단의 경기장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서울 월드컵경기장과 제주월드컵구장이 지역 프로축구단이 없는 관계로 경기장으로써 활용되지 못하고 방치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 시와 축협은 신생팀을 창단하기 위해 노력한다. 서울월드컵구장은 대한민국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프로축구구단이 없는 현실에 많은 축구전문가들은 축구열기를 만들기 위해 서울구단의 필요성을 대두되었다.

2003/06/27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지시에 따라 ‘서울시 프로축구팀 창단 추진 위원회(가칭) 발족을 위한 실무소위원회 구성한다.

2003/07/01 축구회관 회의실에서 ‘서울시 프로팀 창단 축구 소위원회’ 회의를 열고 사회 각계각층 인사 100여명으로 구성된 ‘서울시 프로팀 창단 촉구 위원회’를 구성하며 ‘서울 프로축구팀 창단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한다.

2003/08/28 서울시의회 임시회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은 이강일 서울 시의원의 서울 프로축구팀 창단에 관한 질의에 대해 “창단을 원하는 팀이 나오면 의회에서 결정하여 분담금도 해결할 것이고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변하여 사실상 100억원 지원(탕감)의사가 있음을 밝히고 그로 인해 서울팀 창단은 급 물살을 탄다.

2003/09/03 상암경기장 건설 분담금 250억원을 시울시 100억원 지원, 축구협회 100억원 부담. 신생구단 50억원 부담한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이명박 시장은 스포츠지 편집국장들과 오찬에서 “시민구단보다는 대기업의 창단 또는 기존팀의 연고지 이전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발언

*상암경기장 선설 분담금 논란 – 분담금에 관한 기사는 축구협회 고위 관계자가 “서울시가 100억원 탕감하고 협회가 100억원을 납부하기로 해 신생팀은 창단 기업은 50억만 내면 된다”는 발언으로 그대로 보도한 기사였는데 사실은 축협이 서울시에 100억을 우선 대납하고 신생팀 창단 시 다시 회수하는 것으로 서울시와 협의를 맺는다. 건설 분담금 기사가 나왔을 때 왜 반박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자 서울시와 최종합의 이전에 보도가 나와서 정정 또는 반박 시점을 놓쳤다고 해명. 하지만 협의 이후에도 정정 보도를 하지 않아 축협 고위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50억 만으로 서울 입성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팀 창단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축협의 졸속행정의 모습을 또 보여주었다.

입성자금 150억원 논란 안양 서울행 험로<연합뉴스>2004/02/06

2003/09/14 LG그룹은 안양을 그대로 둔 채 서울에 새로운 프로축구팀을 창단키로 최종 결정했다는 기사 발표

LG그룹, 350억 투입 서울 1호 선점<굿데이 스포츠>2003/0914

2003/11/13 KT, 한화 ,대한항공 그리고 금호그룹 등 많은 기업들이 서울 창단에 관심을 보였으나 창단 비와 축구발전 기금을 제외하고 별도로 서울 입성금 250억원을 내야 하는 자금적 부담감과 회사 내부적으로 창단 반대의 움직임으로 모든 기업들이 백지화를 선언한다.

3파전으로 치닫는 서울 프로축구단 창단 <일간 스포츠> 2003/09/24
금호그룹 서울 프로축구팀 창단 백지화 <연합 뉴스> 2003/11/13

서울 입성금이란? 2002년 월드컵을 개회를 확정했을 때 서울시는 IMP의 여파로 막대한 비용을 소요되는 축구전용구장 신축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대안으로 잠실 종합운동장을 개 보수하여 활용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축협은 서울시를 설득하기 위해 건설비용 일부인 250억원을 지원하기로 하고 이에 따라 서울시도 상암동에 경기장을 신축하기로 결정한다. 250억원은 축협이 직접적으로 신축을 지원했기 보다는 서울 신생팀의 몫으로 남겨놓은 것이었다. 이는1996년 서울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을 비우면서 서울 입성조건으로 전용구장을 신축하면 서울의 연고권을 주겠다는 조항에 입각하여 신생팀의 몫으로 남긴 것이다.

<초점> 월드컵 잠실 개최 발언 왜 갑자기 나왔나 <연합 뉴스> 1998/04/13

2003/12/16서울시에서 신생팀 창단에 어려움 격자 한웅수 안양LG단장은 언론을 통해서 1200억원의 누적 적자를 해결하고 흑자경영을 위해 연고지를 서울로 옮기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하였고 서울시와 연고지 이전에 대한 합의도 끝난 상태라고 발언을 한다. 여기에 연맹은 신생팀 창단과 연고이전의 최종권한은 연맹 이사회의 권한인데 연맹의 한마디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연고이전을 추진하고 있는 사실에 매우 불편해하며 서울팀 에 대해서 선 신생팀 창단 후 기존 팀 이전이라는 기존 조항을 무시하는 행동이라며 곤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서울시의회에서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발언과 달리 ‘서울 연고프로축구단 유치지원 예산 100억원 전액삭감을 의결하여 서울팀 창단은 깊은 늪으로 빠진다.

[프로축구]안양LG’서울LG’된다 <동아닷컴>2003/12/16

2003/12/17 안양서포터 RED는 연고이전 사실 확인을 위해 안양LG구단 방문 후 한웅수 구단주에게 오보된 기사라고 대답을 받는다. 이 인터뷰에 입각하여 RED 홈페이지에 연고이전은 없다는 한웅수 구단주와 인터뷰 공개

"내 12개 구단 중 가장 열악한 환경을 가진 우리 구단의 최고 책임자로서 최고의 명문구단을 꿈꾸며, 서울로의 연고 이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250억원이라는 금액을 지불하면서 까지 연고를 이전 할 수는 없다. 서울시 시의회에서도 내년 예산 중 100억원이라는 금액을 삭감하는 것으로 결정지은 지금 서울시의 지원을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인데, 이러한 기사가 나와 당황스럽다. 기사를 쓴 기자가 몇 주전 회식자리에서 연고이전에 대해 물어와 '적자의 폭을 감소하고, 명문구단으로서의 위상을 생각할 때, 서울 월드컵구장에 관심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는가?'라는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 것이 부풀려서 기사화 한 것 같다. 조인식과, 이사회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없는 사실무근이 다."

2004/01/14 서울시는 ‘서울연고 신생구단 공모 추진’을 발표. 발표 내용은 “15일 서울연고 신생구단 창단에 관한 신문공모를 낸 뒤 오는 27,28일 단 이틀간 희망 기업의 창단 의향서를 받음 공개모집 후에도 희망 기업이 나타나지 않으면 연고 이전을 추진하겠다.” 더불어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공모추진 발표 자리에서 “상암월드컵 경기장 건설 분담감 100억원 지원은 연고이전 구단에게도 동일하다.”라는 발표를 하며 12월에 서울시의회에서 의결한 지원금 전원 삭감의 입장을 바꾸었다.

2004/01/28 서울 연고 신생구단 공모 불발

2004/01/29 서울시가 30일부터 연고지 이전 구단 공모를 낸 뒤 2월 11일까지 연고 이전 의향서를 접수해 내달 중 심사를 거쳐 연고 이전프로축구 구단을 선정하고 협약을 맺을 계획 발표.

2004/02/02안양LG구단 서울로 연고이전 공식 발표 및 서울시에 연고 이전 의향서 제출.

2004/02/06 협회 이사회에서 회의를 갖고 선 신생팀 후 기존팀의 기존 방침을 수정 기존팀이 서울 입성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에 연고를 두었던 부천SK, 성남 일화, 안양LG에게 기득권에 대한 점과 월드컵 경기장 분담금 액수에 대해서는 이사회 안에서 의견이 갈렸다. 협회의 조중연 부회장은 150억을 지불하라는 의견과 안양 한웅수 단장은 50억 이상은 힘들다는 의견. 안양LG에 이어서 부산아이콘스가 서울로 연고이전에 대한 검토 발표. 이런 상황에 인천 유나이티드 로란트 감독 “프로팀에게 연고지는 고향과 같은 곳이다 고향을 버린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냐” “한국구단들이 운영상에 어려움을 들어 연고지 이전을 추진한다고 들었지만 내 축구철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한국 내에 연고이전 풍토에 대한 강한 비판표출

K리그 기존팀 서울 이전 가능<연합뉴스>2004/02/06
축구협 안양 LG서울 입성 ‘태클’<한겨례>2004/02/06
서울연고팀 분담금 150억 내야<일간 스포츠>2004/02/06

2004/02/07 연맹과 서울시 간에 연고 이전팀 선정 주도권 협상 결렬

연고이전 팀 선정의 주도권 협상 – 서울시는 연고이전 의향서를 연맹과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접수 받음으로써 서울시가 직접적으로 연고이전 팀을 선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서울시의 이런 행동에 연맹은 신생팀 창단과 연고이전의 최종권한은 이사회의 몫인데 서울시가 월권행위를 하는 상황이며 연고이전 같은 경우에는 다른 구단과의 조율이 더욱 필요한 상황인데 서울시가 독단적으로 선정한다고 한다면 축구 기반과 합의된 절차를 무너트리는 행위라고 비판하며 접수를 마치고 선정 주도권을 연맹에 이양할 것을 요구.

2004/02/10 축협이 월드컵 100억원 잉여금은 프로 구단 전체의 자신이기에 특정 구단의 연고이전 지원금으로 사용되지 않고 10년간 유소년 축구와 대표팀을 위해 쓰여질 것이라고 발표.

월드컵 100억 잉여금 유소년 축구 대표팀에 쓴다<일간 스포츠>2004/02/10

2004/02/11 부산아이콘스 연고이전 공식 발표 및 부산 아이콘스 문종익 단장이 11일에 서울 시청을 방문 연고지 이전 의향서를 제출함.

프로축구 부산, 서울 연고 이전 신청<연합뉴스>2004/02/11

2004/02/13 이명박 서울시장은 부산대학교에서 열린 특강에서 “부산 아이콘스 서울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발언 과 부산 민심을 걱정하여 부산 아이콘스가 서울로 연고이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밝힘. 연맹은 서울 입성 비용을 150억원에서 75억으로 조정 발표 나머지 75억은 상암을 사용할 두 번째 팀 부담으로 결정된다.

이명박 서울시장”부산아이콘스 서울 오지 않는 게 좋겠다.”<뉴시스>2004/02/14

상암구장을 사용하지 않고 잠실구장에서 창단할 경우 75억원 지불 여부? 협회가 서울시와 상암구장 건설 분담금으로 250억원을 체결한 문서에는 이 금액의 조항이 상암구장으로 한도가 되어 있으며 서울의 잠실구장 창단에 대한 부가적인 조항이 마련되어 있기 않는 상황이다. 그러기에 만약 3부 리그의 서울UTD가 잠실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면서 1부 리그로 참여할 경우 75억원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연맹 관계자와 전화 통화한 결과 협회와 연맹이 이 상황에 대해서 확실하게 조율이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는 입장을 받았다. 협회가 서울시와 체결한 조항 속에서 연맹은 제2의 서울구단이 창단 시 서울입성비용에 대한 정확한 가드라인을 그려 주어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다. 글쓴이가 이 사실을 알기 위해 협회와 연맹을 번갈아 가면서 전화를 하였지만 서로 뚜렷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들으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서로 책임 회피보다는 협회와 연맹의 긴밀한 의사교환 속에서 한국축구의 밑그림이 그려졌으면 소망한다.

2004/02/15 부산 아이콘스는 이명박 서울시장 발언에 대해 불편함 표현. 서울시에서 연고 이전팀을 접수 받는 상황에서 서울시장이 공공연하게 안양LG구단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는 것은 공정성에 위배된다며 서울시의 구단 선정에 대한 문제 제기.

프로축구 부산, 서울 연고 이전 난항<연합뉴스>2004/02/15

서울시와 LG 그리고 축구협회와 현대 관계 – 많은 축구 전문가들이 서울 연고지 이전에 안양LG와 부산 아이콘스가 의향서를 제출하면서 LG와 현대의 대기업간에 힘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그리고 서울시와 축구협회의 마찰이 두 대기업의 관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근거로는 서울시장의 이명박의 형인 이상득의 딸이 LG가의 시집살이를 하며 친척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부산 아이콘스의 모기업은 현대산업계발로 현대중공업과 축구협회 회장을 겸하는 정몽준과 같은 현대 가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서울시의 일방적인 안양LG밀어주기와 협회와 안양LG구단의 불편한 대립은 이런 비밀스러운 관계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프로축구팀 서울입성 루머 난무<일간스포츠>2004/02/06

2004/02/16 서울시와 연맹 축협의 3자 협상 결렬됨. 연맹은 서울 입성 구단의 선정권과 의양서를 연맹에 양도해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하였지만 서울시는 자체적으로 팀을 선정한 뒤 의견을 첨부하여 의양서를 보내겠다고 답변. 이에 협회는 서울시가 선정한 팀에 최종 승인 도장만 찍어달라는 말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며 불편한 감을 표출하였다. 더불어 서울시 의견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서울 입성 구단을 이사회에서 정할 경우 서울시가 소유인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사용을 불허할 것이라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 안양LG구단 또한 연고이전 실패 시 리그 불참 및 구단 해체한다는 강경한 입장 표출.

서울시-프로축구연맹 연고 이전 협의 결렬<연합뉴스>2004/02/16
서울 연고 구단 선정 “3자 회의” 또결렬<일간 스포츠>2004/02/16

2004/02/17 서울시가 서울구단으로써 안양LG가 적합하다는 의견을 첨가한 의향서를 프로축구연맹에 전달. 서울시가 안양LG를 선정한 이유로는 지리적 근접성이나 과거 서울에 연고가 있었던 점과 중소도시 안양에는 프로축구구단이 없어도 되지만 인구 400만의 대도시 부산에는 프로축구단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들었다. 이에 연맹은 의향서를 서울시에 반송하고 독자적으로 서울 연고 이전 팀 선정 작업을 추진하겠다고 입장 천명. 시민구단과 상무를 제외한 9개 구단에 연고이전 의향서를 배포 25일까지 서울시와 별로도 연고이전 접수 진행.

<기자수첩>꼬이기만 하는 서울 프로축구 선정 작업<연합뉴스>2004/02/18
프로축구연맹,서울시 접수 의향서 반송<연합뉴스>2004/02/17
프로축구 서울팀-연맹 충돌로 난관 봉착<연합뉴스>2004/02/17

2004/02/23 최종적으로 이사회의 결정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은 “안양 LG축구단을 서울 연고 이전 팀으로 받아들이겠다”와 “LG와 함께 서울로 연고이전 의향서를 제출한 부산 아이콘스는 프로축구 제 2의 시장인 부산에 하나뿐인 구단으로 서포터와 시의 반대가 심해 이전이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

이명박시장 “서울 연고팀은 LG”<일간스포츠>2004/02/14

2004/02/24 연맹이 연고이전 의향서를 25일까지 접수 받고 있지만 안양LG구단은 연맹이 보낸 의향서에 첨부된 연고이전 시 조건사항들이 이사회를 거치지 않고 연맹이 독단적으로 정하였기에 절차상에 하자가 있다고 항의하며 연맹에 의향서를 제출하지 않겠다는 방침 고수. 안양LG구단이 문제로 제기하는 조건사항은 서울 입성금 75억원이다. 이에 연맹은 25일까지 의향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연고이전 의사가 없다고 간주하겠다는 입장 표명. 부산구단은 25일까지 의향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부산에 잔류한다는 의미로 봐도 된다며 현재 연고이전 가능성은 50/50이라고 밝혔다.

안양”안 내겠다..서울 연고지 의향서 오늘 마감..부산은 50/50<일간 스포츠>2004/02/24

2004/02/25 의향서 마감일은 25일 오후 안양LG구단과 부산 아이콘스 구단의 의향서를 연맹에 제출. 안양은 서울 입성금 50억원에 프로축구발전기금 25억원을 보태 총 75억원으로 연맹과 합의. 부산은 부산시가 마지막까지 구체적인 지원을 제시하기 않아 잔류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표명. 그리고 서울시가 일방적인 안양LG의 편들어주기라는 불리한 상황에서 합법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서울시와 단합하여 연고이전을 준비한 안양LG구단과 달리 절차에 충실히 이행하며 연고이전을 준비하였기에 부산이 명분적으로 승산이 있다고 발언. 의향서를 제출하러 연맹 사무국을 방문한 안양 이재하 사무 국장과 부산의 문종익 단장은 서울 입성이 불발될 경우 팀 해체를 불사하겠다며 연고이전에 강한 의지를 표명

서울 입성 프로축구팀 누가 될까<연합뉴스>2004/02/25

2004/03/04 안양과 부산이 서로 극적인 표 대결을 펼칠 경우 축구 판 전체에 엄청난 후유증을 몰고 올 것이라는 판단에 4일에 예정되었던 연고이전에 관한 이사회 모음을 10일로 유보하였다. 이 동안에 2구단은 지역 지자체 간에 긴밀한 비공식 접촉과 조정작업을 통해 표결 없이 1개팀이 서울로 입성하고 나머지 1개팀은 기존 연고지로 돌아가게 하도록 유도. 만약 10일 까지 결론이 나지 않을 경우 표결을 통해 서울팀을 정하기로 결정. 이사회 투표가 진행될 시에 광주상무를 제외한 12개 구단 단장을 비롯해 대한축구협회전무, 프로연맹회장, 부회자, 사무총장 등 모두 16명의 이사로 구성된다. 이사회 직전까지 연고이전 의향을 철회하는 구단이 없다면 선정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어야 한다. 안양LG는 인천과 부천의 지지와 부산은 같은 현대계열의 전북의 지지를 확정한 상황이다. 시민구단들은 스폰서 기업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기에 양쪽 기업간에 대리전 양산이 될 가능성이 크다.

프로축구 서울 연고팀 10일까지 결론<연합뉴스>2004/03/04
프로축구’서울다툼’기업대리전 양상<한겨례> 2004/02/27

2004/03/10 부산 아이콘스는 부산 시청에서 현대 산업개발의 아반주 사장과 이종환 프로축구 연맹 부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연고지 이전 협의를 철회한다고 발표 부산시와 접촉을 통해 경기장 사용료 감면(25% 10%) 지역 기업들의 A보드 광고 지원 등을 약속 받았다.

프로축구 부산 연고지 잔류 LG서울 입성<연합뉴스>2004/03/10

2004/03/11 프로축구연맹 이사회, LG의 연고이전 최종 승인. 안양LG 서울로 연고이전 구단이름, 엠블럼, 마스코트, 팀 컬러 모든 것을 바꿔 재 창단하는 마음으로 팀을 이끌어나가겠다.

연합인터뷰 서울 입성한 안웅수 LG단장<연합뉴스>2004/03/11




긴글 읽으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이글은 개인적인 의견은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작성된 내용입니다. 개개인들이 연고 이전과정을 읽어보고 연고이전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정립하셨스면 좋겠습니다.

혹시 글을 읽다가 수정되거나 첨부해야 할 점 있으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글은 객관적인 자료에 입각하여 제3자가 수정 편집 및 배포가 가능한 글입니다.

그리고 혹시 위키백과 편집하실수 있는 분이 있으면 '안양LG치타스' 글에 이 자료를 첨부하고 싶습니다. 아직 위키백과 편집 방법을 정확하게 몰라서 자꾸 삭재가 되내요. 위키백과 편집하실수 있는 분은 형식에 맞추어서 이 내용과 링크를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사커월드 靑血風

 

Posted by 공차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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