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첫 출전한 한국대표팀은 그 후 번번히 예산탈락의 고배를 마시다 1964년 동경올림픽 본선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성적을 안고 돌아와야만 했고, 그 후로도 번번히 예선통과를 하지 못한 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하기까지 24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서울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소련과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또다시 예선탈락의 아픔을 맛봐야 했고, 4년후를 기약해야만 했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IOC는 축구 종목은 U-23 선수들로 연령을 제한하였고, 한국은 28년만의 자력 진출을 위해 U-23 대표팀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 후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5회연속 자력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고, 수많은 스타들이 U-23 올림픽 대표팀을 거쳐가게 됐다.
그래서 U-23 대표팀이 처음 결성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부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 중 올림픽 예선과 본선 당시 최고의 활약을 펼치던 선수들로 베스트 11을 구성해보고자 한다. 포메이션은 올림픽 대표팀의 주 포메이션이었던 3-5-2로 선발 하였다.
- GK -
서동명(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생년월일 : 1974년 5월 4일
신장 : 196cm
소속팀 : 울산 - 전북 - 울산 - 부산
1995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이 결성됐을 당시 알고 있던 선수는 94 미국월드컵에 출전한 조진호와 이운재, 그리고 청소년 대표시절부터 촉망받는 수비수로 평가받던 박철 뿐 이었다. 이운재와 조진호는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상황이었고, 박철은 부상으로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당연히 주전 GK는 미국월드컵 당시 독일과의 경기에 출전했던 이운재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전혀 알지 못하던 키큰 골키퍼가 등장해 놀라운 선방을 하기 시작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서동명.
그 후 이운재와 주전 경쟁을 하기 시작했고, 당시 한 경기씩 교대로 출전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의 예상과는 달리 이운재는 매 경기 실점을 하는 방면 서동명은 눈부신 선방을 펼치며 비쵸베츠 감독의 눈에 들게 되었고, 올림픽대표팀 주전 GK 자리를 확보하며, 올림픽 예선과 본선에서 눈부신 선방을 펼치게 된다. 특히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가나와의 경기에서는 윤정환의 페널티킥으로 앞서나간 이후 가나의 파상 공세를 서동명의 선방으로 한 골을 지켜내 48년만의 첫 승을 올리는데 일등공신이 된다. 서동명과 함께 2000 시드니 올림픽의 김용대, 2004 아테네 올림픽의 김영광도 올림픽 당시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올림픽 대표시절의 서동명은 단연 최고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 DF -
김현수(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생년월일 : 1973년 2월 14일
신장 : 176cm
소속팀 : 전남 - 전북
성남과 인천, 대구에서 활약하며 A팀에도 이름을 올렸던 김현수가 아닌 1996 애틀란타 올림픽 주전 수비수 김현수다. 비쵸베츠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을 맡은 이후 수 많은 수비수들이 테스트를 받았지만 김현수의 자리를 위협하진 못했다. 180cm 이상의 장신선수를 선호하던 비쇼베츠 감독은 거의 모든 경기에 김현수를 투입하며 무한 신뢰를 보냈다. 수비수로서 신장은 작았지만 넓은 활동량, 뛰어난 대인마크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올림픽 대표 시절에도 큰 부상없이 꾸준한 활약을 보였으며, 1995년 전남에 입단해 프로생활을 시작한 이후 안정적인 선수생활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1998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이후 후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대표팀의 호출은 없었지만 K리그에서 대표 수비수로 평가받았고, 2001년 K리그 올 해의 수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동기들이 하나, 둘씩 은퇴를 하는 상황에서도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으로 전북 수비형 미드필더와 스토퍼로 활약. 최근 은퇴를 하고 전북의 코치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상헌(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생년월일 : 1975년 10월 11일 신장 : 184cm 소속팀 : 안양 - 인천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 수비수. 장신에 힘이 좋아 아시아 예선 당시 제공권 싸움에서 이상헌을 이길 수 있는 아시아 선수는 없었다.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헤딩골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 후 본선에서도 이임생, 이경춘 같은 와일드 카드가 선발되어도 최종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며 좋은 활약을 펼치게 된다.
동국대 졸업 후 드래프트에서 안양의 지명을 받아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안양 입단 이후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K리그에서는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하면서 소속팀과 대표팀 관계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1998년 차범근 감독에 눈에 들면서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였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게 된다. 하지만 매 시즌 부상들 달고 생활을 하다보니 프로선수로서 꾸준한 활약을 하지 못했고, 인천에서 방출된 후 신갈고 코치를 맡고 있다.
조병국(2004아테네올림픽) 생년월일 : 1981년 7월 1일 신장 : 181cm 소속팀 : 수원 - 전남 - 성남 - 베갈타 센다이(JPN)
2004년 아테네 올림픽팀 수비라인의 리더. 2000년 U-19 시절부터 박용호, 임유환과 함께 강력한 수비라인을 구축했으며 아테네 올림픽까지 함께 했다.(임유환은 올림픽 예비엔트리) 강력한 대인마크와 높은 점프력을 바탕으로 공중볼에서도 상대 공격수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2004아네테 올림픽 최종예선 무실점을 기록했다.
청소년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2003년에는 A팀에 선발되어 주전 수비수로도 활약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 상태에다가, 와일드카드로 유상철까지 합류하면서 주전 자리마저 위협받았고 아시아 예선당시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팀을 8강에 진출시켜놓으며 2006월드컵 대표팀 주전을 예약하는 듯 했다. 하지만 전남에서의 트레이드, 다시 성남으로의 이적, 부상 후유증으로 K리그에서 제대로 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대표팀에서 조병국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핌 베어백 감독시절 잠깐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만 당시 김진규-강민수 라인을 중용하던 베어백 감독은 조병국을 기용하지 않았고, 부상까지 겹치면서 그 후 대표팀과의 인연은 점점 멀어였다. 대표팀과의 인연은 멀어졌지만 K리그에서는 최고의 센터백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소속팀 성남을 상위권으로 이끄는 수비의 핵으로 자리잡았다. AFC챔피언스리그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 현재 베갈타 센다이로 이적.
이기형(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생년월일 : 1974년 9월 28일 신장 : 181cm 소속팀 : 수원 - 성남 - 서울 - 오클랜드 시티(NZL) 1996 애틀란타 올림픽 부동의 오른쪽 윙백. 1993년 U-20 세계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주목을 받았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의 핵심멤버로 활약했다. 측면에서 화려한 드리블이나 크로스는 없었지만 안정된 수비력과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종종 득점을 올리면서 비쇼베츠 감독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큰 부상이 없다면 오른쪽 윙백의 자리는 항상 이기형의 자리였다. 98,02 월드컵에 참가한 최성용이 백업멤버로 뛸 정도로 이기형의 자리는 확고했다. 96애틀란타 올림픽에서도 팀이 1승1무1패를 기록하는 동안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예선 마지막 이탈리아와의 경기에는 1:0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동점골을 기록하기도 했다.(하지만 추가 실점으로 8강진출 실패) 올림픽대표 이후 A팀에서도 동기들중 유일하게 선발되어 96아시안컵에 참가할 정도로 국내감독들도 이기형을 신임하였고, 98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항상 백업멤버에 머물렀던 최성용이 급성장하면서 다시 한번 둘의 대결구도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차범근 감독은 당시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던 최성용을 최종 엔트리에 합류시키면서 월드컵의 꿈은 멀어져갔다. 그 후에도 최성용, 박진섭, 송종국등 뛰어난 오른쪽 윙백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대표팀과의 인연은 멀어졌다. 대표팀과의 인연은 멀어졌지만 K리그에서는 뛰는 팀마다 오른쪽 풀백의 자리는 이기형의 자리였다. 이 자리를 놓고 이기형과 박진섭을 놓고 상당히 고민을 했었으나 내 손은 결국 본선에서 좀 더 좋은 활약을 보여준 이기형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영표(2000년 시드니 올림픽) 생년월일 : 1777년 4월 23일 신장 : 177cm 소속팀 : 안양 - PSV 에인트호벤(NED) - 토트넘(ENG) - 도르트문트(GER) - 알 힐랄(KSA) 청소년대표 경력도 없는 건국대 소속의 이영표가 1999년 처음으로 올림픽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 그 후 올림픽2차예선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이며 당시 올림픽대표팀 감독이었던 허정무감독의 신임을 얻기 시작하였고, 그해 6월 A팀에 선발돼 코리아컵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코리아컵 이후에도 왼쪽 자리에서 이영표를 위협할만한 선수는 나타나지 않았고, 올림픽 최종예선에서도 오른쪽의 박진섭과 함께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중국을 따돌리고 올림픽 티켓을 확보하였다. 박진섭이 뛰어난 수비력과 정확한 크로스로 상대팀을 위협했다면 이영표는 박집섭과는 반대의 스타일로 박진섭처럼 수비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수비와 활발한 오버레핑으로 올림픽 대표팀에서 최고의 왼쪽 윙백으로 활약했다.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스페인에게 0:3으로 패할 당시 골키퍼 김용대와 함께 유이하게 제몫을 해준 선수로 해외 언론으로부터 평가받기도 했다.
올림픽 이후에도 A팀 왼쪽풀백은 이영표의 자리이며, 2002월드컵 이후 에레디비지에 진출과 EPL,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등 유럽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사우디 알 힐랄로 이적 팀을 상위권으로 이끌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으나 계약 만료 후 유럽 이적과 은퇴를 놓고 고심중이다.96애틀란타 올림픽의 박충균이나 04시드니올림픽의 김동진 같은 좋은 왼쪽 윙백들이 있지만 올림픽 예선과 본선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이영표가 조금 앞서지 않았나 생각된다.
윤정환(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생년월일 : 1973년 2월 16일 신장 : 173cm 소속팀 : 부천 - 세레소(JPN) - 성남 - 전북 - 사간도스(JPN)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 최고의 플레이 메이커. 윤정환의 양질의 패스로 올림픽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 최용수에게 많은 득점 찬스를 만들어줬다. 96애틀란타올림픽 최종예선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핵심멤버로 평가받았고, 비쇼베츠 감독은 윤정환을 대체 불가능한 선수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올림픽 본선 가나와의 경기에서도 황선홍이 얻어낸 패널티킥을 성공시키며 팀의 1:0 승리를 이끄는등 올림픽 8강의 기대감을 한층 높였지만 마지막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패하며 8강 진출은 실패하고 말았다. 올림픽 이후에도 소속팀 부천SK에 복귀해 니폼니쉬 감독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주축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쇼베츠 이후 A팀 감독들은 윤정환을 반쪽짜리 선수로 평가하며 대표팀 선발에 회의적인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98프랑스월드컵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2002한.일월드컵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지만 단 1분도 출전하지 못하고 그의 국가대표팀 경력을 마감했다. 이 자리도 노정윤, 고종수같이 좋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들이 많았지만 올림픽대표팀에서의 활약은 윤정환이 가장 나았다고 생각된다.
이천수(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신장 : 174cm 소속팀 : 울산 - 레알 소시에다드(ESP) - 울산 - 페예노르트(NED) - 수원 - 전남 - 알 나스르(KSA) - 오미야(JPN) 와일드 카드 출전선수를 제외하고 최태욱과 함께 유이하게 2회 연속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최고의 재능으로 평가받던 부평고 3학년 이천수는 시드니올림픽대표팀에 합류하게 된다. 평가전과 올림픽 예선에서 조금씩 출전을 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만다. 자신보다 4~5살 많은 선배들과 함께 당당히 본선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올림픽 2차전 모로코와의 경기에서는 자신의 패널티킥을 골키퍼가 막아내자 이를 다시 차넣으며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선 3차전 칠레와의 경기에서는 보복성 플레이로 퇴장을 당하면서 올림픽 8강에 대한 꿈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했다. 4년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팀의 막내였지만 2004아테네올림픽에서는 팀의 주축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대표팀의 에이스 박지성이 아시아 최종예선에 참가했지만 소속팀 PSV의 차출거부로 올림픽 본선에 참가할 수 없었고, 이천수가 팀을 이끌어 나가야했다. 올림픽 대표팀은예선에서 좋은 활약과 약간의 운도따르면서 8강에 진출했고,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면 4강진출까지 노릴수가 있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3골을 허용하며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혼자 두골을 넣으며 맹추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2:3패배를 당하며 8강 진출에 만족해야했다.
팀은 패했지만 이천수는 대회기간내내 최고의 활약을 보여줬다. 올림픽대표 이후에도 2회연속 월드컵대표에 선발되는등 승승장구 하였으나 계속된 해외진출 실패와 K리그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서 팬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하였고, 얼마전까지 사우디리그에서 활약하였으나 급료문제로 팀을 나와 J리그로 이적.
서정원(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생년월일 : 1970년 12월 17일 신장 : 173cm 소속팀 : 상무 - 안양 - 스트라스부르(FRA) - 수원 - 잘츠부르크(AUS) - 리드(AUS)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의 주전스트라이커. 노정윤, 정재권, 이임생, 신태용등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지만 대표팀의 에이스는 서정원이었다. 올림픽 1차예선에서 많은 득점을 올렸고, 친선대회에서도 많은 골을 기록했지만 정작 최종예선에서는 골이 터지질 않았다. 중국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최종예선에서의 부진을 털어낸 서정원은 올림픽 본선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고, 본선 3차전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자신의 장점인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선제골을 기록하며 유럽 빅클럽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안양의 끈질긴 구애로 안양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 후 1998년 1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이적 꿈에 그리던 유럽진출에 성공했고, 첫 시즌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프랑스에서 쎄오 열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 시즌만에 수원으로 국내리그 복귀, 2002월드컵대표 탈락하고 말았다. 수원과의 계약기간 만료 후 다시 유럽으로 날아간 서정원은 오스트리아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올림픽 대표시절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활약했고, 서브 포지션으로 측면에 섰지만, 국가대표팀에서는 주로 오른쪽과 왼쪽의 측면공격수로 활약했다. 최태욱과 마찬가지로 서정원도 중앙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계속 활약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워낙 뛰어난 선수라 측면에서도 잘해줬지만 중앙이 더 어울렸을 것 같은 선수. 최고의 활약을 보인 11명을 뽑다보니 이천수와 마찬가지로 주 포지션이 아닌 측면 미드필더로 선발하게 됐다.
최용수(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신장 : 184cm 소속팀 : 안양 - 상무 - 안양 - JEF이치하라(JPN) - 주빌로(JPN) - 교토(JPN) - 서울 대한민국 역대 스트라이커중 가장 탁월한 결정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던 스트라이커 최용수. 올림픽대표 시절부터 뛰어난 활약을 보인 최용수는 주전스트라이커 맹활약하며 96애틀란타 올림픽 본선으로 이끌었다.
올림픽 본선에서는 대표팀 주전스트라이커 황선홍이 합류하면서, 최종예선에서 함께 활약하던 우성용이 탈락했고, 황선홍으로 인해 최용수의 올림픽대표팀 내에서의 입지도 줄어드는 듯 했다. 하지만 최용수의 입지는 줄어들지 않았고, 본선에서도 주전으로 경기에 출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최용수는 본선과 인연이 없었다. U-20 세계대회에서도 무득점을 기록했던 최용수는 애틀란타 올림픽 본선에서도 무득점을 기록했고, 98프랑스월드컵, 2002대한민국 월드컵에서도 부진한 활약으로 큰 대회에 약한 단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K리그와 J리그에서 놀라운 득점력을 선보였고, 결정력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의 선수로 불리우다 은퇴. K리그 최연소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고 있다.
이동국(2000년 시드니 올림픽) 생년월일 : 1979년 4월 29일 신장 : 185cm 소속팀 : 포항 - 베르더 브레멘(GER) - 포항 - 상무 - 포항 - 미들스브로(ENG) - 성남 - 전북 역대 최연소로 1998프랑스월드컵에 참가한 이후 승승 장구. 각급 대표팀에 모두 선발될 정도로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다. 시드니올림픽 대표팀이 구성된 이후 부상이나 A팀 호출이 없는 이상 항상 올림픽대표팀 명단에서 이동국의 이름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올림픽대표팀에서의 입지는 절대적이었다. 두 살 위의 형들과의 경쟁에서도 절대 우위를 점하며 올림픽 대표팀 주전스트라이커로 활약. 올림픽예선과 각종 대회에서 고비때마다 득점과 도움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올림픽대표팀에서는 최전방과 쉐도우 스트라이커를 맡았고, 심지어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될 정도로 허정무 감독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절대적 신임이 독이 되고 말았고, 부상을 앉고 시드니올림픽출전을 강행. 예선 3차전 칠레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승리로 이끌었으나 1차전 스페인에게 0:3으로 패한 것이 화근이 되어 2승1패를 기록하고도 팀은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올림픽이 끝나고 곧바로 아시안컵 대표팀에 합류 대회 득점왕을 기록하였지만 무릎부상을 달고 무리하게 출전을 하다보니 몸 상태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유럽무대에 진출하였으나 고질적인 부상과 슬럼프로 인해 유럽무대에서는 실패를 맛보았고, 성남으로 이적. 하지만 성남에서도 이렇다할 활약없이 전북으로 이적해 생에 최초 득점왕과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당시 각급 대표팀에서 이동국의 팀내 입지가 절대적이다보니 무리하게 출장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혹사로 이어져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아쉬운 선수. 만약 지금의 지동원이나 기성용처럼 대표팀 선발에 있어서 조율이 가능했다면 지금도 훌륭하지만 좀 더 나은 이동국의 모습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글을 마치며. 이렇게 올림픽대표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11명의 선수를 선발해봤다. 1988년 서울올림픽때부터 올림픽 축구를 봐왔지만 선수선발 연령이 제한된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때부터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지금도 관심을 갖고 있는 대회중 하나다. 23세 이하의 선수들이 출전을 하다보니 미래의 스타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과거 올림픽을 보면서 이 선수가 곧 스타가 될거라 예상하고, 딱 맞아떨어졌을때의 기분은 뭔가 모를 뿌듯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우리에게 기쁨도 주고, 좌절도 안겨주었던 올림픽 앞으로 1년후의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본인이 선발한 11명의 선수들보다 더 뛰어난 선수들로 구성된 올림픽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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