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K리그명 변경.

출처:프로축구연맹

1983년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프로축구의 명칭은 수퍼리그였다.
프로 2, 실업 3팀의 기형적인 형태로 리그 운영이 시작되었지만 프로축구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으로 창설 초기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후 하지만 1991년 일본 J리그가 출범하고, 출범 이전부터 갖춰진 튼튼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눈부신 성장을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아시아의 각 리그들이 하나
, 둘씩 리그명칭을 변경하기 시작하였고, 대한민국의 프로축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퍼리그에서 코리안리그로 그리고 1998년 대한민국프로축구는 K리그라는 이름으로 리그 운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K리그라는 명칭은 J리그의 아류작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연맹에서는 이렇다 할 변경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프로축구 승강제가 논의되는 시점에서 리그 명칭도 변경 논의가 되고 있으나 이번엔 잉글랜드 프로리그 EPL을 본따 가칭 KPL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름보다는 우리만의 이름을 가진 리그 이름을 가지는건 어떨까? 사실 리그라는 단어를 대체할만한 마땅한 단어가 없기 때문에 리그는 그대로 놔두더라도 우리만의 이름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수많은 예쁘고 좋은 한글이름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만들 수 있다.

과거 인터넷에서 으뜸리그’ ‘버금리그로 추진하자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아주 좋은 이름이고, 이 외에도 많은 좋은 이름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J리그를 모방한 K리그나 EPL을 모방한 KPL보다는 으뜸리그, 버금리그가 더 좋지 않을까? 혹자는 촌스럽다는 반응도 있고, 어색한(?) 한글이름의 리그보다는 멋진(?) 영문 이름이 좋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우리만의 이름으로 만들어서 계속 사용한다면 더 자부심이 생기지 않을까? 그리고 더 익숙해지지 않을까? 이제는 동아리가 써클보다 더 익숙해졌듯이 말이다.

 

2. 승강제 도입.

사진출처 : 베스트일레븐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국가에 승강제가 없다
. 최다 우승국가이기 때문에 승강제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축구리그는 우승권 팀들의 치열한 우승 경쟁과 강등권 팀들이 리그 잔류를 놓고 막판까지 치열한 순위 경쟁으로 리그 막판까지 팬들에게 많은 재미를 안겨준다.(물론 해당팀 팬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지금의 K리그에는 챔피언결정전 직행 티켓과 6강 플레이오프로 인해 상위권 팀들의 치열한 경쟁은 있지만 하위권 팀들의 강등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치열함은 없다. 다행히 2013년부터 K리그 승강제를 추진하기 위해 공청회가 개최되는 등 노력을 하고 있으나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나와있지 않은 상황이다. K리의 상위리그를 만들 것인지, 승격 의지가 있는 기존 내셔널리그팀 일부를 올려 2부리그를 구성할지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상황. 승강제가 실현되어야만 더 많은 볼거리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K리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3. 컵대회 변경.

사진출처 : 프로축구연맹

2010K리그팀들이 참가한 대회는 K리그와 AFC챔피언스리그, F.A, 그리고 포스코 컵대회가 있었다. K리그는 주말에 치러졌고, 주중에는 AFC 챔피언스리그와 리그 컵대회, F.A컵이 치러졌다.



리그 초반 AFC챔피언스리그 참가팀들을 제외한 팀들은 포스코 컵대회와 F.A컵을 치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컵대회에 2군을 내보내는등 소홀한 모습을 보여왔다.

사실 컵대회는 이렇다할 매리트가 없는게 사실. 타이틀에 대한 권위도 다른 대회에 비해 낮은게 사실이며, F.A컵처럼 우승팀에게 챔피언스리그 티켓이 주어지지도 않는다. 우승상금 1억원이 전부. 팀들에겐 컵대회에 전념할 매리트가 없는 대회로 인식되어 있고, 팬들도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셔날리그나 챌린지리그 팀들을 참가시켜 컵대회를 운영한다면 기존 F.A컵과 별반 차이가 없는 대회가 된다.

그렇다면 출전선수들의 연령 제한을 두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어떨까? 의무적으로 각팀의 U-23이나 U-25 연령대의 선수들로 구성을 의무화 하는 것이다. 물론 스쿼드가 얇은 리그 하위권 팀으로선 U-23 선수들만으로 팀을 구성 하는건 무리가 따르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유소년 K리그 전 구단이 U-18 유스팀을 갖추고 있는 상황이라 부족한 선수들을 U-18에서 차출해 컵대회에 참가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미래의 1군인 선수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4. 드래프트제도 보완.

사진출처 : 연합뉴스

    
개인적으로 드래프트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 중 하나다
. 하지만 드래프트를 계속 해야 한다면 현행 드래프트 제도를 보완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동안 무작정 고교, 대학 졸업예정자들 전부를 드래프트 대상에 놓고 드래프트를 하다 보니 장래가 총망되는 선수들이 하나, 둘씩 J리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런 선수들을 잡기 위해서라도 일부 선수들은 자유계약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어떨까?

세리에A는 팀당 EU국적외 선수 영입을 1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우리도 전면 드래프트를 시행하는 것 보다는 각 구단별로 자유계약 선수를 1명 영입할 수 있는 쿼터를 주고 자유계약 시한을 따로 두어 계약을 마친 선수들 이외의 선수들로 드래프트를 치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한 드래프트 연령 제한을 폐지해 촉망받는 어린 선수과 드래프트 신청을 원하면 나이에 관계없이 드래프트 신청이 가능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6세때 프로1군에 데뷔한 웨인 루니처럼 K리그에서도 15~6세의 어린 선수가 프로에 데뷔해 돌풍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싶고, 노장 선수들과 함께 뛰며 많은 것을 배우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싶다. 201032세 가희와 19세 리지가 함께 무대에 섰던 에프터 스쿨처럼 말이다.

 

5. 아시아쿼터제 확대.

2009년부터 시행된 아시아 쿼터제. 리웨이펑이 수원과의 계약으로 AFC가맹국 출신의 선수들이 하나, 둘씩 K리그에 입성하기 시작했다. 사샤처럼 좋은 활약을 보인 선수도, 리웨이펑처럼 실력과 상품성을 인정받았던 선수가 늘어나면서 2011시즌을 준비하는 각 구단들은 아시아쿼터제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기 시작하였다. 2009시즌 중국, 호주, 일본에 국한되었던 외국인 선수들이 2010시즌 우즈벡출신의 제파로프가 합류하면서 더 많은 우즈벡 출신의 선수들이 K리그를 밟게됐다. 뿐만 아니라 울산에서는 사우디 국가대표 출신의 선수와 계약중이라고 하니 점점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실력이 뒤쳐진다고 느껴지는 동남아시아권 선수들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적응이 힘들다는 중동권 선수들의 영입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검증된 선수를 선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동남아시아나 중동쪽의 선수를 영입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아시아쿼터제를 좀 더 확대 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EPL처럼 무작정 EU국적의 선수들에게 전면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아시아쿼터 1명을 AA. 이외에 23세 이하의 선수 1명을 AB쿼터로, 아주 어린 유망주 19세 이하 선수를 AC쿼터로 나누어 영입을 해 보는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동남아시아나 중동의 어린 유망주가 K리그팀에 입단해 실력을 쌓아 유럽 리그로 이적을 해 구단에 이적료를 안겨준다던지 아니면 자국리그로 돌아가 K리그를 알리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실력과 마케팅 모든 면에서 보템이 됐었던 리웨이펑사진출처 : OSEN

  


6.
유망주 계약도입.

현재 K리그는 유소년 계약 없는 상태. 각 팀별로 고등학교 한 곳을 지정해 유소년팀으

울산의 유니폼을 먼저 입었으면 어땠을까?사진출처:마이데일리

로 육성을 하고 있지만 고교 졸업 후 드래프트에서 우선 지명을 받은 후 프로계약을 할 수가 있는 시스템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팀내 유망주를 해외 클럽에 빼앗기고 마는 사태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고 있다.
현대고에 재학중이던 남태희는 광양제철고의 지동원, 동북고 김원식과 함께 축구협회 지원으로 잉글랜드 레딩으로 유학을 떠날 당시 울산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남태희를 잉글랜드로 보내야만 했다. 그 후 남태희는 레딩을 거쳐 프랑스 발렝시엔으로 이적을 했고, 울산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남태희 뿐만 아니라 전남드래곤즈 유스팀에 해당하는 광양제철고 선수도 학교를 자퇴한 후 분데스리가 모 팀의 유소년팀에 입단하였고, 전남 또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선수를 보내줘야만 했다. 이처럼 아무런 계약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수가 자퇴를 하고, 다른 팀으로 이적을 한다면 막을 방법이 전혀 없는 상황. 이를 위해 해당 유스팀 선수들과 유망주 계약을 맺고, 그들에게 일정금액을 지급하는 계약을 맺어 안전장치를 확보해야 할 것이다. 많은 금액의 연봉을 지급해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의 장학금 정도의 금액으로 계약을 맺어 우수 선수를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뺏기는 일은 없어야 할 그래야만 어린시절부터 공들여 키워온 유스 선수들을 보호하고, 미래의 1군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7. K리그 인터넷방송국 설립.

201135. K리그가 개막하지만 K리그가 개막하고 얼마 후 곧바로 프로야구도 개막을 할 것이다. 언론의 야구찬양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며, 이는 TV방송과 신문기사의 내용에서도 명확하게 들어나고 있는 부분이다.

그동안 우리는 모든 스포츠채널에서 프로야구를 중계하는 동안 인터넷 문자중계로
K리그를 보고, AFC챔피언스리그를 보기 위해 해외 사이트를 돌아 디니며 어렵게 축구를 봐왔다. K리그소속의 홈팀 경기를 외국 사이트를 이용해 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공중파 방송과 케이블 방송에서도 K리그 팀들의 경기가 중계되지 않는다면 인터넷방송국을 설립해 운영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인터넷방송으로 전 경기를 중계할 순 없지만 주중 펼쳐지는 챔피언스리그와 주말 리그 한 경기 정도는 인터넷으로 방송하는 것이다.

물론 방송을 하기 위해는 많은 비용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를 광고비용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 K리그 경기가 치러지는 날이면 아프리카에 개설된 많은 K리그 중계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스포츠토토로 인해 K리그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늘기 시작하였고, 잠재적인 시청자가 점점 늘어가는 상황이라 충분히 인터넷 광고로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8. K리그 명예의 전당 건립.

1983년 시작된 프로축구는 올해로 28년이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스타플레이어와 명감독, 명승부전이 치러졌지만 이러한 축구의 역사를 보존할만한 곳을 아직 갖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프로축구 30주년 기념으로 K리그 명예의 전당을 건립하는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K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들을 이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며, 그들을 지켜보며 자란 세대들도 명예의 전당을 방문해 K리그의 역사를 둘러보고, 지난날의 기억을 회상 해볼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국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명예의 전당. 이제 우리도 한번 가져 봅시다.

 

9. K리그 스카우팅 리포트 발행.

유럽축구가 시작되는 8~9월 국내에서 해외 축구리그 스카우팅 리포트가 판매되기 시

우리도 K리그 스카우팅 리포트를 갖고싶다. 사진출처 : 스포츠미디어

작한다. 뿐만 아니라 프로야구와 프로농구 심지어 미프로농구(NBA)의 스카우팅 리포트가 제작되어 국내에서 판매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타 스포츠 스카우팅 리포트가 하나, 둘씩 발매가 되는 동안 K리그 스카우팅 리포트는 단 한 차례도 발매된 적이 없었다.

K
리그는 언론에서의 외면으로 인해 팀이나 선수에 대한 정보 노출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K리그와 AFC챔피언스리그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늘어가는 이때 K리그 스카우팅 리포트를 출간하여 많은 팬들이 좀 더 쉽게 많은 정보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인터넷 검색으로 선수들에 대한 정보를 금방 알 수 있는 상황이지만 K리그를 시청할 때 옆에 스카우팅 리포트 한권 놓고 시청하는것도 괜찮을 것 같다. 2011 K리그 스카우팅 리포트는 힘들 것 같고. 2012 K리그 스카우팅 리포트를 기대해 본다.

 

10. 올스타전 변경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유럽이나 남미에는 올스타전이 없다. 보통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는 국가 대한민국이나 미국, 일본등의 리그에만 존재하는 올스타전. 유럽이나 남미에서는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앨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많은 스타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 팬들에게 K리그를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이를 살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1
년부터 시작된 올스타전은 그동안 두 팀으로 나눠 올스타 선수들을 선발해 경기를 치르다 1995년과 1996년에는 국내선수 올스타와 K리그 외국인선수 올스타로 나눠 멋진 경기를 펼치며 많은 재미를 주었다. 그 후 다시 중부선발과 남부선발로 나눠 올스타전을 치르다 2008년과 2009년에는 K리그 올스타와 J리그 올스타가 단판승부를 벌이는 올스타전을 치르다. 지난해 뜬금없이 K리그 올스타팀은 바르셀로나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이런 대외적인 경기보다는 예전처럼 국내선수 올스타와 외국인선수 올스타의 경기를 부활시키는 것은 어떨까? 물론 외국인 골키퍼는 영입이 불가능한 상황이니 주변 AFC가맹국 소속의 GK를 초청해 경기를 치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기존 올스타전은 대량득점과 경기의 박진감이 떨어지는 것 때문에 재미면에서는 많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예전처럼 국내선수VS외국인선수의 경기를 개최한다면 국내선수와 외국인 선수간의 경쟁으로 많은 재미와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사진출처 : OSEN

   

Posted by 공차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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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수, 이동국, 김은중의 영향으로 대학을 거치지 않고, 프로로 진출하는 선수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1999년 광양제철고의 김경일이 억대 계약금을 받으며 전남에 입단하자 고교에서 프로로 직행하는 선수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1999년 결성된 청소년 대표팀은 방가반두컵등 여러 대회에 참가하며 조직력을 완성시키기 시작하였고, 2000년 1월 일본 신년 4개국 청소년대회에서 강호 파라과이와 이탈리아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대표팀 주축 이천수, 최태욱, 박지성은 이미 U-23올림픽대표팀으로 월반하여 올림픽 본선에 참가하여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2000년 11월 U-19아시아선수권대회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였다.

 

하지만 본선 첫 경기 중국과의 경기에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골게터 취보(28.칭다오)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0:1패배를 당하고 만다. 첫 경기에서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대표팀은 2차전에서 파키스탄을 7:0으로 대파하며 1차전의 부진을 말끔히 씻어냈고, 3차전에서도 UAE를 4:2로 격파하고 희망을 이어갔다. 하지만 같은조의 이라크와 중국이 승승장구 하면서 조3위를 기록하고 있어 예선 마지막 상대인 이라크를 무조건 이겨야만 예선 통과를 바라볼 수 있었다.

 

2000년 11월 19일 이라크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 대회 최강팀으로 평가받는 한국이었기 때문에 이라크는 수비에 중점을 두며 경기를 이어 나갔고, 한국팀은 그런 이라크 수비를 뚫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대회 3연패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한국을 제치고 예선을 통과한 이라크는 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 또한 2001년 아르헨티나 세계대회에 참가하여 16강에 오르는등 좋은 활약을 펼쳐 대한민국 U-19 대표팀으로선 더욱 아쉬움이 남는 대회로 남고 말았다. 대회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박지성,이천수,최태욱은 2002 월드컵 주역으로 활약하였고, 출전 선수중 상당수는 2004 아테네 올림픽대표팀에 선발되며 대표팀 경력을 이어나갔고, A팀에도 선발되는등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대표팀 선수들.

 - GK -

 

                                         

박동석(28.서울) - 1997년 정유석(32.부산), 1999년 김용대(30.성남)에 이어 거제고에서 3대회 연속으로 주전 GK를 배출했다. 그 이름은 거제고를 졸업하고 아주대에 입학한 박동석. 1999년 청소년 대표팀이 구성될 당시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던 박동석은 2000년 일본 신년대회 파라과이 전에서 눈부신 선방을 펼치며 주목 받았고, 주전 GK로서 김지혁, 김영광보다 한 수 앞선 신력을 보여줬다. 아주대 중퇴 후 2002년 안양에 입단한 박동석은 신의손의 백업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신의손 은퇴 이후 주전 GK는 박동석의 몫이라 생각했으나 포항에서 김병지(39.경남)가 이적해오면서 주전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고, 결국 상무에 입대해 기회를 노렸다. 2007시즌 과거보다 많은 경기를 뛰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009년 제대 후 팀에 복귀한 박동석은 김병지가 떠나고 공석이 된 주전 GK 자리를 김호준과 잠시나마 경쟁을 하였지만 또다시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말아 현재 김호준의 백업 골키퍼로 활약중이다.

  

김지혁(28.포항) - 박동석의 백업 골키퍼. 고교 졸업 후 아주대를 선택한 박동석과 달리 2000년 경남상고 졸업 후 부산으로 프로 직행. 주전 골키퍼로 뛰기엔 어린 나이였고, 당시 부산에는 주전 GK정유석이 활약하고 있었다.

 

2000년 U-19 아시아 선수권대회 당시 박동석의 벽을 넘지 못했고, 두 살 어린 김영광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대표팀내에서도 입지가 불안했다. 대표팀의 입지와는 달리 부산구단에서는 김지혁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고, 미래의 주전 GK로 육성하기 위해 자매구단이었던 헤렌벤연수를 보내는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정유석과 2002년 입단한 김용대(30.성남)로 인해 다시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고, 2005년 울산으로 이적을 결심하게 된다. 울산에는 서동명이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었고, 다른 경쟁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울산 이적 후 서동명대신 챔피언결정전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후 2006 시즌부터 주전자리를 꿰찼지만 전남에서 김영광이 이적해오면서 다시 주전에서 밀려 2008년 포항으로 이적. 신화용과 다시 경쟁을 펼쳤지만 현재 주전경쟁에서 밀린 상태다.

 

 김영광(26.울산) - 2000년 U-19 청소년대표팀 선발 당시 제3의 골리. 이미 U-16대표시절부터 기량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1~2년 선배들을 제치고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될 수 있었다.

 

당시엔 벤치멤버였지만 2002년 U-19 당시 염동균(26.전남)과 성경일(25.광주)을 제치고 주전 GK로 활약했고, U.A.E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02년 전남 입단 후 당시 주전 GK박종우의 백업으로 활약하다 2003년부터 전남의 주전 GK로 활약했고,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 그 해 A매치에 데뷔하기도 했다.

 

공중볼에 약하고, 골키퍼로선 어린 나이다보니 안정감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엔 거칠것이 없었고, 대표팀에서도 이운재(36.수원)을 위협할 유일한 선수로 평가받으며 2006 독일 월드컵 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하지만 상무 제대 후 돌아온 염동균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전남에서의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고, 2007년 이적을 결심. 울산으로 이적하여 활약중이다.

 

- DF -

박용호(28.서울) - 2000 U-19 주전수비수. 조병국(28.성남)과 수비라인을 구축하며 좋은 플레이를 펼쳤고, 2004아네테 올림픽에서도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으며 A매치에 데뷔하게된다.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활약으로 한국대표팀의 미래로 평가 받았지만 소속팀에서 주전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며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2005시즌 군에 입대해 광주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두 시즌동안 광주에서 활약한 후 팀으로 복귀했으나 당시 이적한 김진규와 입대전 박용호와 주전 경쟁을 다투던 김치곤의 존재로 인해 출장에 어려움이 따랐다. 지금은 준 주전급로 활약하며, 김진규와 김치곤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조병국(28.성남) - 당시 수비라인의 핵심. 강력한 피지컬을 앞세운 맨마킹으로 상대팀 공격수를 무력화시켰다. 청소년대표 시절에도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2001년 12월 골드컵을 앞으로 대표팀에 선발되는 기쁨을 맞기도 했다. 비록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대표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고, 2002년 연세대를 중퇴하고 수원에 입단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2002년 구성된 아시안게임대표에도 선발되었고, 올림픽대표팀에서도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을 6전 6전승 무실점으로 본선진출 시키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물론 A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해나갔다. 하지만 올림픽 본선을 앞두고 당한 부상으로 인해 올림픽 본선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 후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소속팀에서의 입지도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수원은 김남일(32.고베)의 영입을 위해 고종수와 함께 조병국을 전남에 보내는 트레이드하면서 수원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 해 조병국은 다시 성남으로 현금트레이드 되었고, 이적 초기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실망스러운 경기 내용을 보여줬으나 김학범 감독의 신임으로 경기에 출전하며 감각을 익히면서 좋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성남의 막강 포백라인의 한 축으로 성장한 조병국이었지만 그 후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잠시 대표팀에 선발된 적은 있지만 부상으로 인해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고, 그 후 대표팀 감독들은 수비 능력은 좋으나 공격 전개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대표팀에서 선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병규(27.광주) - 임유환(26.전북)과 함께 제2의 홍명보로 불리우던 박병규. 당시엔 임유환보다는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았고, 부평고 3학년때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되어 아시아청소년대회 당시 주전으로 활약했다.

 

고교 졸업 후 연고 구단이었던 안양과 고려대에서 박병규를 스카우트 하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고, J리그 교토 퍼플 상가까지 러브콜을 보냈다. 박병규가 고교 졸업 후 선택한 곳은 고려대. 교려대에서 4년간 활약하며 대학 최고의 수비수로 인정 받았다.

 

하지만 일찍 프로행을 선택한 선,후배들이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는 동안 대학무대에서 활약하던 박병규는 조금씩 잊혀지기 시작했고, 2000 U-19 대표팀 멤버들이 주축을 이룬 올림픽대표팀에도 출범 초기 선발됐을 뿐 그 후 박병규란 이름을 대표팀 명단에서 볼 수 없었다. 대표팀과 인연은 없었지만 고려대 졸업 후 울산에 입단하자마자 주전으로 활약하며 성공적인 프로생활을 시작했고, 올 해 광주에 입대한 이후에도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다. 

 

 

임유환(26.전북) - 또다른 제2의 홍명보. 당시 U-19 멤버들은 1981~2년생이 주축으로 된 대표팀이었기 때문에 당시 광양제철고 2학년이었던 임유환과 김영광의 선발은 그들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다는 이야기다.

 

임유환은 당시 선배들에 밀려 많은 시간을 출장하지 못했지만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2년 후 대회에서는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며 대회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2001년 김영광,장경진과 함께 광양제철고를 전국 최강의 팀으로 이끈 임유환은 이들과 함께 전남에 입단할 것이 유력했으나 축구명문 한양대에 입학을 결정하면서 프로행을 잠시 미루게 됐다.

 

한양대에 입학한 이후에도 전남과 J리그에서는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고, 2002년 U-19대회 우승을 이끈 후 프로행을 결심하게 된다. 그의 첫 프로무대는 J리그. J리그 입단 초기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부상으로 주전자리를 뺏긴 후 한동안 출전하기가 힘이 들었고, 벤치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2003년 U.A.E U-20 세계대회에도 임유환은 2002년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많은 실책과 무리한 롱패스 남발로 인해 팬들로부터 많은 질책을 받았다.

 

소속팀은 2부리그로 추락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올림픽 대표팀 최종엔트리에도 탈락하면서 결국 국내 복귀를 결심하게 되었고 전북에 입단하게 된다. 하지만 국내로 돌아왔지만 J리그 스타일로 경기를 펼치다보니 K리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주전경쟁에서 또다시 밀리고 말았다. 2007년 울산으로 트레이드 됐으나 그 해 다시 전북으로 돌아올 정도로 리그내에서 불안한 입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2008 시즌이 시작되면서 임유환은 예전의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하기 시작했고, 중앙수비수, 수비형 미드필더로 맹활약하면서 국가대표에 선발되기도 했다. 2009시즌에도 좋은 활약을 펼치며 전북을 리그 1위로 올려놓는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청소년대표 시절 불리던 제2의 홍명보란 수식은 더 이상 붙질 않는다.

 

 신동근(28.성남) - 동기생들과 달리 세계무대를 경험했던 유일한 선수. 1999년 U-20 세계대회에서 유일한 고교생으로 선발되어 3차전 말리와의 경기에 투입되었고, 2000년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도 많은 기대를 받은 기대주. 청구고 졸업 후 연세대에 입학한 신동근은 탁월한 기량과 좌우 플백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하며 대표팀의 주전으로 활약했다. 박지성, 이천수, 최태욱만큼의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했지만 2001년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A팀에 합류하면서 이영표(32.알히랄)와 송종국(31.수원)을 이을 기대주로 평가 받았다.

 

대학무대에서 신동근의 적수는 없었고, 2003년 프로진출을 선언하고 성남에 입단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성남에 입단 후 바로 주전을 꿰찰 수 있는 선수라는 평가를 내렸지만 성남 입단 이후 부상으로 2군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재활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소속팀에 복귀했지만  이기형, 박충균같은 베테랑과 국가대표 출신 풀백 박진섭, 연습생 출신 장학영이 신동근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많은 출장시간을 부여받지 못했고, 큰 부상으로 오랜기간 그라운드를 누비지 못하면서 예전만큼의 기량이 나오질 않았다. 2007년 상무에 입대해 두 시즌을 보내고 2009년에 성남으로 복귀했지만 주전확보는 아직 미지수.

 

김동진(27.제니트) - 안양공고 졸업 후 2000년 안양에 입단해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했지만 동기생들만큼 많은 주먹을 받지 못했다. 대표팀에서도 좌측 풀백, 중앙수비수, 수비형 미드필더등 확실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러 위치를 옮기며 뛰기 시작했다.

 

청소년대표시절보다는 올림픽대표팀으로 올라가면서부터 주 포지션인 왼쪽 풀백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이영표의 대체자는 더 이상 신동근이 아닌 김동진이었다. 올림픽 본선에서 득점도 기록하고, 정확한 크로스로 어시스트를 까지 기록하며 올림픽기간동안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소속팀에서도 왼쪽풀백 주전으로 활약했고, 대표팀에서도 이영표의 백업이었지만 왼쪽 풀백이외에도 중앙수비수도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급성장. 2006월드컵대표로 선발되어 프랑스와 스위스 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월드컵이 끝나고 아드보카트감독과 함께 제니트에 입단하면서 러시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생활하면서 대표팀 주축 선수로 성장하였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남아공 월드컵에서 왼쪽 풀백의 자리는 김동진이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 MF -


박지성(28.맨유) - 청소년 대표팀보다 올림픽 대표팀에 먼저 선발된 특이한 케이스. 박지성과 같은 경우는 전무후무한 경우일 것이다. 초등학교시절 차범근축구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망주였으나 중고교시절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하고 수원공고 은사의 도움으로 1999년 명지대에 입학하게 된다. 명지대와 올림픽대표팀간의 연습경기에서 허정무감독의 눈에 띄어 올림픽대표팀에 선발되었고, 오른쪽 풀백으로 활약하면서 조금씩 입지를 다져나갔다.

 

올림픽대표시절 J리그팀들로부터 관심을 받아온 박지성은 명지대를 중퇴하고 교토 퍼플 상가에 입단하게 되었고, 올림픽 본선에도 출전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U-23에 선발되어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당시 스포트라이트는 1년 후배 이천수, 최태욱이 받고 있었다. 올림픽팀이 해산하고, 아시안컵에 참가한 후 곧바로 청소년대회에 참가하는 강행군으로 박지성의 몸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결국 팀의 예선탈락을 막지 못했고, 박지성은 U-20 세계대회 경험 기회를 놓치고 만다. 대회가 끝난 후 교토로 돌아간 박지성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줬고,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 꾸준히 대표팀에 선발되면서 2002년 월드컵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는등 대표팀 주역으로 급성장하게된다.

 

2003년 교토와의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박지성은 히딩크의 러브콜을 받고 PSV 아인트호벤에 입단하게 된다. 그 곳에서 팀을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올려놓으면서 유럽 명문구단의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결국 맨유에 입단하게된다. 맨유 입단 후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했지만 팀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평가받았고, 대표팀에서는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2006년 월드컵에 참가하기도 했다. 현재 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으며,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팀의 주장이자 에이스로 맹활약 할 것으로 예상.

 

김정우(27.광주) - 부평고 시절부터 대형 미드필더로 각광받은 유망주. 청소년 대표팀 당시한 살 많은 최원권(28.광주), 전재운(28.제주) 같은 좋은 미드필더들이 많았지만 전혀 뒤지지 않는 좋은 활약을 펼쳤다. 고려대 3학년때 프로진출을 결심하고 2003년 K리그 강팀 울산에 입단하게 된다. 청소년대표 이후 구성된 U-23 올림픽 대표팀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주전자리를 꿰찼고, 올림픽 본선에서도 득점을 기록하는 등 8강 진출에 일등공신 이었다. 

2005시즌 울산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이후 대학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온 J리그 나고야에서 이적제의를 해오면서 2006년 J리그로 진출하게 되었다. 유럽선수들과 몸싸움에 약점을 보이던 김정우로선 J리그가 어울리는 리그였는지 좋은 활약을 펼쳤고, A팀의 김남일(32.고베), 이호(25.성남), 김상식(33.전북)등과 함께 주전경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2006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월드컵이 끝난 K리그 성남으로 돌아와 주전으로 활약. A팀에서도 노장 김남일과 김상식이 대표팀과 멀어지면서 김정우에게 꾸준히 기회가 왔고 현재 A팀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2010시즌 광주상무에서 활약하기 위해 군입대 준비중이다.

 

 

최원권(28.광주) - 동북고 시절 고교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불리웠던 최원권. 1999년 방가반두컵에서도 재치 있는 플레이를 보여줬고, 2000년 안양 입단 후 U-19대회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대회가 끝나고 소속팀으로 복귀했지만 당시 안양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던 안드레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 조광래 감독의 권유로 윙백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윙백으로 출전하면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U-23팀에서도 중앙 플레이메이커가 아닌 오른쪽 윙백으로서 박규선과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주축 선수들중 상당수가 A팀에 이름을 올렸지만 최원권은 대표팀 승선에 번번히 고베를 마셨고,  서울로 팀의 오른쪽 풀백으로 활약하다. 2009 시즌 군입대하면서 광주에서 뛰고 있다. A팀에 처음 선발되기엔 나이도 있고, 뛰어난 오른쪽 풀백들이 많다보니 대표팀 전망이 밝지 않다.

 

전재운(28.제주) - 공격형 미드필더와 쉐도우 스트라이커, 윙을 모두 겸할 수 있는 공격적인 선수. 청소년 대표 시절에도 어느 위치에서든지 제 몫을 해내던 선수였다. 킥력 또한 우수해 팀의 전담키커로 활약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장점을 드러내지 못해 2002년 울산대를 졸업하고 입단한 울산에서도 주전을 확보하지 못한채 많은 팀을 떠돌아다녔고, 올림픽대표팀에서도 경쟁자였던 김두현이나 이천수에게 밀리면서 서브로 활약해야만 했다. 지금도 많은 팀으로 이적하며 선수생활을 하고 있으며 현재 제주에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김영삼(27.광주) - 중앙과 측면에서 모두 플레이할 수 있는 전천후 선수. 정명고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프로팀의 관심을 받았지만 고려대를 선택. 대학에서 4년을 보내게 된다.

 

너무 오래 대학무대에서만 활약을 하다보니 올림픽 대표 선발에서 외면받기 시작하였고, 동기들에 비해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2005년 울산에 입단. 입단하자마자 1군에서 로테이션멤버로 활약하며 리그 우승에 일조했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몫을 충분히 해내는 선수로 평가받았고, 주전급 선수로 발돋음하게 된다. 하지만 김정남 감독이 물러나고 김호곤 감독이 부임하면서 출장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현재 군 문제 해결을 위해 상무 입대 예정이다.

 

 

김병채(28.대전 한수원) - 최전방 스트라이커, 중앙 미드필더, 중앙수비수등 멀티플레이어로 각광받았다. 2000년 프로 입단 이후에도 제 2의 유상철로 기대를 모았고,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멀티플레이어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 멀티 능력이 김병채에게는 독이 됐는지, 프로에서 김병채의 경쟁력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동기들보다 일찍 하향세에 접어들었다. 2009시즌을 끝으로 내셔널리그 대전 한수원으로 팀을 옮겨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 FW -

 

이천수(28.알 나스르) - 2000년 U-19 청대의 에이스. 부평고 시절부터 주목받았고, 1999년 방가반두컵 득점왕과 2000년 일본신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파라과이와 이탈리아 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이름을 대한민국 전역에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U-23감독이었던 허정무 감독또한 폭발적인 스피드와 탁월한 득점력을 겸비한 이천수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하기도 하였고, K리그 안양과 고려대가 막판까지 이천수를 스카우트 하기 위한과정은 전쟁을 방불케 했었다.

 

이천수는 결국 유럽진출을 위해 고려대를 선택했고, 고려대에 입학 후 유럽 여러구단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으며 유럽진출을 준비했다. 하지만 에이전트 문제 등으로 유럽진출에 난항을 겪었고, 2002년 울산에 입단하면서 유럽 진출을 잠시 미루게 된다. 울산에 입단하고, 2002 월드컵대표팀에도 선발되어 대한민국에 월드컵 4강에 진출하는데 기여하면서 이천수의 몸값은 치솟기 시작하였다. 여러 유럽구단에서 이천수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2003년 1월 레알 소시에다드에 입단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2년 6개월간의 스페인 생활동안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지 못한 이천수는 다시 국내 무대로 복귀 2005시즌 울산을 K리그 챔피언으로 이끌며 MVP를 차지하기도 한다.

 

울산에서의 활약뿐만 아니라 2006독일 월드컵에서도 주축선수로 맹활약하며 2007년 다시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이적 성공적인 유럽생활을 예상했으나 또다시 유럽무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2008년 수원임대되어 돌아왔다. 수원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없이 훈련중 태업을 보이면서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2009시즌 다시 전남에 임대되었으나 다시 사우디 구단과의 계약 논란으로 K리그 생활을 정리하고 현재 알 나스르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사건으로 인해 K리그 복귀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해외리그에서 선수생활을 계속 할 듯 하다.

 

박규선(28.부산) - 청소년대표팀에서 가장 빠른 주력을 자랑하던 선수. 이천수, 최태욱만큼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서울체고 시절부터 잠재력 풍부한 스트라이커로 평가받아 고교졸업 직후 울산에 입단했다. 주전으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울산이 키우던 미래의 주축선수로서 교체멤버로 활약했다.

 

입단 후 스트라이커 포지션을 버리고 우측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한 박규선은 몸싸움과 수비력은 부족했지만 빠른 순발력과 경험이 쌓이면서 최원권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고,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주전 오른쪽 풀백으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잠깐 A팀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지만 오른쪽 풀백에는 이미 송종국이 있었고, 후배 조원희(26.위건), 오범석(24.울산)의 급성장하면서 그 후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2007년 군에 입대해 광주에서 활약. 2009년에 제대를 하면서 2010 시즌 부산 아이파크에서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최태욱(28.전북) - 고교시절부터 이천수, 박용호와 함께 부평고를 고교최강의 자리로 올려놓았고, 고교시절부터 항상 이천수와 각급 대표를 거쳤으며 이로 인해 항상 이천수와 경쟁아닌 경쟁을 해야만 했다.

 

2000년 연세대의 유혹을 뿌리치고 안양에 입단했지만 자신이 원하던 중앙공격수가 아닌 측면 미드필더, 윙백으로 뛰게됐다. 국가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에서는 쉐도우 스트라이커나 윙포워드로 뛰었으나 소속팀 안양의 조광래 감독은 계속 윙백으로 뛸 것을 지시하였고, 2004년 인천으로 이적하면서 다시 본래의 포지션을 되찾게 되었다.

 

인천에서 한 시즌을 보냅 최태욱은 J리그 시미즈 S펄스의 이적 제안을 받고 2005년 이적해 일본에서 두 시즌을 보내게 된다. 시미즈와의 계약 만료 후 울산에 입단하려 했으나 연봉등의 문제로 울산 대신 포항행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포항에서 파리아스 감독의 전술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벤치멤버로 전락하고 말았고, 2007시즌 포항이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2008시즌 다시 전북 유니폼으로 갈아입게 되었고, 2009시즌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는데 수훈을 세웠다. 전북에서 이미 주전을 확보한 상태이기 때문에 2010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칠것으로 예상된다.

 

주광윤(27.광주) - U-16 시절부터 주목받던 유망주. 중대부고 졸업 후 고려대에 입학 최성국(26.광주), 김정우(27.광주)와 함께 고려대 01학번 트로이카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최성국과 김정우 모두 대학을 중퇴하고 2003년 프로에 진출할 당시 주광윤도 대학을 중퇴하고 전남에 입단하게 된다.

 

전남에 입단할 당시 많은 기대를 받고 입단했으나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뛰기엔 체격이 작고 몸싸움이 약하며,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뛰기도 어중간한 스타일이라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대학 동기 최성국, 김정우가 U-23, A팀으로 승승장구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정체된 모습을 보였고, 전남에서도 주전을 확보하지 못하며 특징 없는 스트라이커로 전락하고 말았다.

 

2009 시즌을 마치고 군 입대를 위해 상무에 지원한 상태며 군 입대 후 조재진처럼 급성장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전상대(27.대구) - 청소년대표시절 조재진, 주광윤에 밀려 주목받지 못한 스트라이커. 한양공고-숭실대를 졸업하고 2006년 경남에 입단. 경남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2008년 대구로 이적했으나 대구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이 없어 현재 대구 2군에서 뛰고있다.

 

 

조재진(28.감바) - U-19 주전스트라이커. 대신고 시절 탁월한 득점력으로 프로팀들의 관심을 받았고, 2000년 수원에 입단한다. 수원은 1998시즌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동국(30.전북)만큼 해줄것으로 기대했지만 당시 수원 스쿼드에서 조재진이 주전으로 활약하기란 힘이든 상황이었고 수원 구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대표팀에서도 이천수와 최태욱이 득점을 기록하는동안 약체 파키스탄전에서 한 골을 기록했을 뿐 대회기간 동안 부진을 거듭하며 팀은 결국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K리그로 돌아와서도 득점력 빈곤은 계속 되었고, 수원에서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2001시즌을 끝으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2003시즌 광주상무가 K리그에 참가하면서 광주 상무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게 된다. 광주 상무 시절에도 득점력은 떨어졌지만 활발한 움직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부동의 원톱을 차지하게 된다. 군 제대 후 수원에 복귀하게 되었고, 올림픽 본선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며 팀을 8강에 진출 시켰다. 하지만 소속팀 수원에서는 마르셀, 김동현에게 밀리면서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2004년 J리그 시미즈 S펄스로 이적하게 된다.

 

J리그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다시금 주목 받았지만 대표팀에서는 이동국에게 밀리면서 백업 스트라이커로 머물러 있었다.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이동국의 부상으로 주전을 꿰찬 조재진은 원톱 스트라이커로 무난한 활약을 보이며 유럽 클럽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J리그 계약기간이 만료되면서 유럽 진출을 시도했지만 끝내 불발 되었고, K리그 전북으로 이적했다. 전북 이적 후 시즌 10골을 기록하면서 전북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입지를 다지는 듯 했으나 한 시즌만에 J리그 감바오사카의 제의를 받고 이적. 국가대표와의 인연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 현재 상태는 J리그에 최적화된 스트라이커. 

Posted by 공차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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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공격력으로 아시아를 정벌.

1997년 말레시아 세계대회에서 참패를 당한 뒤 결성된 1979년생을 주축으로 한 청소년 대표팀이 결성된다. 이동국(29.미들스브로)이 A팀에 선발된 상황에서도 김은중(29.서울), 설기현(29.풀럼), 서기복(29.인천)등 쟁쟁한 선수들이 맹활약하여 U-19 아시아 선수권대회 본선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고, 98 프랑스 월드컵에도 출전한 이동국이 청소년대표팀에 합류하면서 역대 최강의 공격진이란 평가를 받게 된다.

 

아시아 선수권대회 본선에서도 불안한 수비력을 막강 공격으로 극복하였고, 예선에서 만난 일본을 이동국, 김은중의 득점으로 2:1승리를 거두며 조 1위를 차지하며 우즈베키스탄과 준결승을 치르게 된다. 무난한 승리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 되었으나 수비진의 잇단 난조로 인해 승부차기까지 가능 상황에 이르렀고, 골키퍼 김용대의 눈부신 선방으로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

 

결승전의 상대는 예선에서 2:1로 격파한 일본. 다시 만난 일본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김은중의 선취 득점으로 먼저 앞서 나갔으나, 일본의 역습에 한국 수비진이 무너지며 실점. 1:1상황으로 후반을 맞이한다. 이동국은 후반에 교체되어 필드를 누비기 시작하였고, 환상적인 터닝슛으로 득점을 기록하며 2:1승리를 기록. 한국은 2회연속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동국은 대회 득점왕을 기록한다. 이동국, 김은중, 정용훈등 프로 3인방의 활약과 골키퍼 김용대(29.광주)의 활약으로 우승을 차지한 한국은 곧바로 다음해에 있을 세계대회를 준비하게 된다.


정보력 부재와 감독의 전술미스로 다시 한 번 좌절.

아시아 챔피언으로 세계대회를 준비하던 한국은 아시아 대회 우승으로 이끈 박창선 감독을 해임하고, 조영증 감독을 선임하게 된다. 조영증 감독은 아시아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정용훈을 엔트리에서 제외하고, 많은 유망주들은 테스트 하며 최종 엔트리 18명을 선발하기에 이르렀다. 합숙 훈련과 올림픽 대표팀과의 평가전에 좋은 기량을 펼치기 시작하였고, 기존 아시아 선수권 멤버 외에도 97 말레이시아 세계대회에 참가했던 서기복과 광양제철고를 졸업하고 전남에 입단한 미드필더 김경일, 81년생으로는 유일하게 선발된 청구고 에이스 신동근(27.광주)까지 선발하면서 한층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게 된다.

 

이번엔 반드시 4강에 진출할 거라며 언론에서는 다시 4강 신화를 재현할 것으로 예상하였고, 조편성 또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강호들은 피해 포르투갈 - 우르과이 - 말리와 한 조를 이루게 되어 예선 통과를 낙관적으로 평가하였다. 예선 통과 후 대진운만 더 따른다면 다시 4강진출을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 하였다.


1차전 VS포르투갈

89, 91 U-20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91년 세계대회 당시 남북 단일팀을 0:1로 격파했던 포르투갈, 한동안 월드컵 출전을 하지 못했지만 청소년대회에서 강세를 보이던 포르투갈과 1차전을 치르게 됐다. 남북 단일팀이 패한 경우가 있지만 언론에서는 이번만큼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거라 장담 하였고, 국민들의 기대도 그 어느때보다 컸다.

 

한국은 초반에 승부수를 두고 부터 맹공을 퍼부었지만 전반 28분 소사에게 실점하며 위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오버페이스라고 생각할 정도로 많이 뛴 한국이었기에 그 실점은 더욱 뼈 아픈 상황이었다. 그 후 한국은 계속 맹공을 퍼부었고, 전반 37분 대표팀 주장 김건형의 득점으로 1:1 무승부 상황으로 전반을 마칠 수 있었다.

 

후반들어 체력이 떨어진 한국은 포르투갈에게 밀리기 시작하였고, 계속되는 포르투갈의 공격을 김용대가 선방하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바르셀로나 소속이었던 시망 사브로사와 촉망받는 미드필더였던 휴고 레알이 한 골을 만들어내며 역전을 시킨 상황이었고, 한국 청소년 대표팀 선수들은 쥐가 날 정도로 체력이 바닥 난 상황이라 추격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수비수 박동혁의 파울로 페널티킥을 허용하고 말았다. 후반 41분 시망이 페널티킥으로 다시 득점을 올렸고, 한국은 추가득점에 실패하며 1:3으로 패하고 말았다. 무리하게 초반에 승부수를 띄우다 결국 패하며 첫 승을 다음 우르과이 와의 경기로 미뤄야 했다.


2차전 VS 우루과이

포르투갈에게 1:3으로 패한 한국은 다음 상대인 우루과이를 반드시 꺾어야만 했다. 언론의 예상과 다르게 조 최약체로 평가됐던 말리는 우르과이를 격파한 상황이어서, (포르투갈 또한 말리에게 일격을 당한다.) 우르과이를 격파해야 16강 진출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루과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대회 최우수 GK로 선발된 카리니를 비롯해, 주포 체반톤, 포를란이 활약한 우루과이는 한국보다 우세한 전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경기 시작 후 한국팀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수비 불안이 노출되었고, 수비수들의 실수로 인해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체반톤에게 득점을 허용하고 만다. 그 후 이동국, 김은중 투톱과 중앙미드필더 김경일, 서기복을 앞세워 포르투갈을 몰아 붙였으나 우루과이 GK 파비앙 카리니의 눈부신 선방으로 인해 득점을 올리지 못했고, 결국 0:1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국은 2패를 기록하게 되었고, 말리와의 경기에서 대량 득점을 기록하고, 포르투갈-우루과이 경기 결과를 지켜 보는 수 밖에 없었다.


3차전 VS 말리

대회 최 약체로 평가받던 말리의 전력은 예상외로 강했다. 축구강호 포르투갈과 우르과이를 격파하고 2승을 기록해 16강 진출을 확정 지은 상황이었고,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1.5진급 선수를 투입하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한국-말리의 경기 시작전 포르투갈-우루과이의 경기가 먼저 진행되었고, 두 팀은 90분간 공돌리기를 하며 무승부를 기록. 한국은 말리와의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16강 탈락을 하고 만다. 그래도 1승을 올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선수들의 열망은 강했고, 설기현 2골, 이동국, 나희근의 득점으로 말리를 4:2로 격파하고, 1승 2패로 조 최하위를 기록하고 만다.



한국과는 다르게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에게만 2패를 기록한 일본은 조1위로 예선을 통과하고, 포루투갈, 멕시코, 우르과이를 격파하며 대회 결승까지 진출 준우승을 기록하였고, 한국축구는 그 후 큰 충격에 휩싸이고 만다. 1999 나이지리아 청소년 대표 세대들은 그 후 97청대가 주축을 이룬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 일부가 합류하였고, 이동국, 설기현, 김용대, 김은중, 송종국등 비교적 성공적인 선수생활하며, 현재까지 A팀에서도 입지를 다지고 있다. 이 외에도 당시 엔트리에 잠시 이름을 올렸던 이정수, 이상일등도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거나 K리그에서 오랜기간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주요 선수들.


김용대(29.광주) - 거제고 시절부터 주목받던 GK김용대는 청소년대표 시절에도 두각을 나타내며 주전GK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U-20 대표팀에서 맹활약한 김용대는 U-23 올림픽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고교 2년 선배 정유석(31.부산), 김태진, 최현(30.제주)등을 제고 주전 GK로 올림픽에서도 맹활약하며 차세대 GK로 각광받게 된다. 2000년 일본과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고, 눈부신 선방으로 이운재(35.수원), 김병지(38.서울)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한다.

 

연세대 졸업 후 자유계약으로 계약금 3억원에 부산에 입단하게 되었고, 프로로서도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2001년 히딩크 감독이 한국대표팀을 맡은 이후에도 꾸준히 대표팀에 선발 되었지만 최종 엔트리에서 최은성(37.대전)에 밀리게 되면서 2002년 월드컵 당시 선수들의 모습을 TV로 바라봐야만 했다. 그 후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면서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후배 김영광(25.울산)의 눈부신 성장으로 인해 대표팀 차세대 GK 자리도 내주고 만다.

 

성남으로 이적 후 K리그에서 맹활약하던 김용대는 아드보카트 감독에 눈에 들었고, 2006독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합류하게 된다. 대표팀 주전 GK이운재의 맹활약으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4년후를 기약하게 된다. 대표팀에서는 후보였지만 K리그 성남에서는 주전 GK로서 우승을 맛보기도 하였고, 현재 군에 입대에 광주 상무의 골문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한동진(29.제주) - 김용대의 백업으로 대표팀에 합류했던 끝내 김용대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백업멤버로 만족해야만했다. 상지대 졸업 후 부천에 입단하였고, 2003년 주전GK를 확보하는 듯 하였으나 현재 조준호, 최현에 밀려 팀 내에서도 제 3의 GK로 밀린 상태.


이범직(29.천안) - 대표팀에서 수비를 맡던 이범직은 그 후 프로로 진출해 부천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였지만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현재 K3리그 천안시청팀에서 플레잉 코치로 활약중이다.


박동혁(29.울산) - U-20 대표팀의 핵심선수로 평가받던 박동혁은 그 후 U-23팀에서도 주전 수비수 자리를 꿰차며 올림픽본선까지 참가하게 된다. 그 후 독일의 FC 쾰른에서 관심을 갖는 등 촉망받는 기대주로 성장하게 된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독일행과 K리그 진출로 고심하던 박동혁은 계약금 3억원에 전북 현대에 입단하기에 이른다. 그 후 최진철과 함께 전북 수비진을 이끌었지만 대표팀에서는 기존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며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2006년 울산으로 이적 하게 되었고, 현재 울산의 주장으로서 성공적인 프로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잦은 실책성 플레이로 인해 대표팀과는 인연이 멀어진 상태.


송종국(29.수원) - U-20출전 당시 주전 오른쪽 수비수였으나 이동국, 김은중, 김용대, 설기현같은 선수들로 인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세계대회가 끝나고 연세대에서 묵묵히 활약하던 송종국은 2000시드니 올림픽 멤버로 선발되었고, 당시 학연으로 선발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칠레와의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보였고, 2001년 1순위로 부산에 입단. 당시 A팀 감독이었던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어 대표팀에도 합류하게 된다. 두바이 4개국 대회에서 U.A.E와의 경기에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득점을 올리며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고, 2002년 월드컵까지 부동의 오른쪽 풀백으로 자리를 잡는다.

 

월드컵이 끝나고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이적한 송종국은 네덜란드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성공적인 유럽생활을 이뤄나가는 듯 하였지만 계속된 부상과 감독과의 불화로 유럽생활을 정리하고 수원으로 이적하게 된다. 그 후 기량이 쇠퇴했다는 평가속에서도 2006년 월드컵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려 활약하였지만 2002년 만큼의 기량이 나오지 않는건 사실이다.


전재호(29.인천) - 송종국과 함께 좌우 측면을 맡았던 전재호. 하지만 2년 선배 이영표. 2년 후배 신동근의 활약으로 그 후 대표팀과의 인연은 없는 듯 했다. 홍익대를 졸업하고, 성남에 입단해 프로생활을 시작한 전재호는 체격은 작지만 빠르고, 저돌적인 수비로 프로에서 무난한 활약을 펼쳤고, 2004년 창단한 인천으로 이적. 지금까지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고 있으며 2004년에는 코엘류감독의 부름을 받고 A팀에 합류하기도 했다.


신동근(27.광주) - 79년생이 주축을 이룬 당시 대표팀에서 81년생 신동근의 최종 엔트리 합류는 파격적이었다. 당시 조영증 감독은 박용호, 조병국, 김해출등 81년생 선수들을 테스트 하였고, 유일하게 신동근만이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세계대회 1,2차전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3차전 말리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해 좋은 활약을 펼쳤고, 그 후 촉망받는 선수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연세대 재학시절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어 대표팀에서도 잠시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고, 2003년 리그 최강팀 성남 일화에 입단하기에 이른다. 이영표와 송종국을 위협할 차세대 주자로 평가를 받았지만 성남 입단 이후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전재호, 박진섭, 장학영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2007년 군 입대를 결심하고 현재 광주상무에서 활약중이다.


김건형(29.은퇴) - U-20 대표팀의 주장으로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1차전 포르투갈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는등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경희대 졸업 후 드래프트에서 울산에 지명받아 프로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주전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하였고, 2003년 대구로 이적. 재기의 기회를 노렸지만 끝내 부상의 악령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2004년 스물 다섯 어린 나이에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서기복(29.은퇴) - 97 U-20 대표팀 시절부터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 쿠칭쇼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세계대회에 임했지만 1승2패로 또다시 예선탈락하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청소년 대표팀 해산 후 올림픽 대표팀에도 잠시 이름을 올렸지만 같은 포지션의 고종수, 이관우에 밀리며 자리를 잡지 못한다. 연세대 졸업 후 프로가 아닌 상무행을 선택. 군 제대 후 전북에 입단하게 된다.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주목 받는 유망주로 전북에 입단하여 즉시 전력감으로 평가됐으나 전북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한 시즌만에 인천으로 이적하게 된다. 인천에서도 백업 미드필더로 뛰다 2008년 은퇴를 결심하고 현재 인천 U-12 감독재직중이다.


김경일(28.은퇴) - 광양제철고 시절 김해출과 함께 고교무대를 평정하고, 청소년 대표팀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고교 졸업 후 연고 구단인 전남에 입단하게 되었고, 그 해 4월에 열린 세계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윤정환, 고종수를 발굴한 기영옥 감독의 발굴로 기대를 모았으나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전남에서는 경기장보다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결국 전남에서 방출되어 대구로 이적했으나 대구에서도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방출당하고 만다. 그 후 내셔널리그 서산으로 팀을 옮겨 실업축구선수로 활약하였으나 서산에서도 방출 결국 은퇴에 이르게 된다.


이동국(29.미들스브로) - 포철공고시절부터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곽광받기 시작했다. 1996년 2살 많은 선배들 틈에서 청소년대표로 활약했으나 세계대회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하고 2년 후를 기약하게 된다. 고교 최대어로 명문대학과 연고구단 포항의 러브콜이 끊이질 않았고, 고민끝에 1998년 포항에 입단하게 된다. 포항 입단 후 월드컵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역대 월드컵 최연소 대표로 프랑스 대표팀에 합류하게 된다.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는 후반 서정원과 교체 출전하여 두 차례 위협적인 슈팅을 기록하기도 하였고, 그 후 한국축구의 희망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곧바로 청소년 대표팀에 합류해 아시아청소년대회에서 대회 우승과 득점왕을 기록하며 세계대회를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정작 세계대회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 예선탈락이 확정된 상태에서 치른 말리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게 된다. 청소년대표팀 해산 후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하였고, 올림픽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로 맹활약하게 된다. 올림픽 대표팀 뿐만 아니라 A팀에도 이름을 올렸고, 아시안컵에서는 득점왕을 차지하며 유럽구단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고,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브레멘에 임대 선수로 입단하게 된다. 하지만 부상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6개월간의 유럽생활을 정리하게 되었고, 그 후 슬럼프를 겪으면서 2002월드컵 최종 엔트리 탈락하게 된다.

 

그 후 4년간의 준비 끝에 다시 월드컵 무대에 도전을 하였지만 또다시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 엔트리에 합류하지 못하게 된다. 6개월이 넘는 재활기간을 거친 이동국은 다시 유럽무대 도전을 선언하였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미들스브로에 입단하게 된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벤치멤버로 굳혀진 상태. 현재 국내 복귀와 타리그 이적을 고려하고 있다.


김은중(29.서울) - 고교시절부터 네티즌으로부터 천재 스트라이커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동북고 중퇴 후 대전에 입단하면서 당시엔 전무한 고교중퇴 프로선수가 됐다. 아시아청소년대회 예선 당시 이동국이 빠진 상황에서 실질적인 에이스로 활약하였고, 아시아 본선에서 이동국과 역대 최강의 투톱이라는 평가속에 최고의 활약을 펼치게 된다. 대전에서 무난한 활약을 펼쳐 나갔고, 올림픽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3-4-3 에서는 원톱 이동국이 버티고 있었고, 3-5-2를 사용할 당시 최철우, 신병호등과 경쟁을 하였지만 이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본선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한다.

 

그 후 A팀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지만 메이저 대회와는 인연이 없었다. 대전시티즌에서 주축선수로 활약을 하다 J리그 베갈타 센다이에서 잠시 뛰게 되었고, 대전으로 돌아온 후 갑작스럽게 서울로 이적 현재 활약중이다.


설기현(29.풀럼) - 청소년 대표 시절 이동국, 김은중이라는 당시 최고의 투톱으로 인해 최전방 공격수가 아닌 측면 미드필더로 활약하게 된다. U-20 세계대회 말리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그 후 대표팀에서도 윙포워드로 활약하며 올림픽 최종예선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올림픽 본선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했고, 광운대 졸업 후 축협의 유럽진출 프로젝트 추진으로 벨기에 로얄 앤트워프에서 활약하게 된다.

 

첫 시즌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벨기에 구단의 러브콜을 받기 시작하였고, 리그 최강 안데레흐트로 이적하게 된다. 안데레흐트 이적 후 한국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는등 성공적인 유럽생활을 이어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안데레흐트에서 주전경쟁에서 밀리면서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위기를 맞는 듯 했다.

 

대표팀에서는 왼쪽 윙포워드로 주전을 확보하며 2002 월드컵에 참가하여 4강에 오르는데 공을 세운다. 그 후 잉글랜드리그에 진출. 울버햄튼과 레딩을 거쳐 현재 풀럼에서 활약중이다.


나희근(29.-) - 동북고 시절부터 김은중과 함께 최강 투톱을 이뤘던 나희근. 아주대 진학 후에도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U-20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이동국, 김은중, 설기현등 최강의 공격진을 구성한 대표팀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으며 실력을 인정받았고, 세계대회에서는 말리와의 경기에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아주대 졸업 후 드래프트에서 포항의 지명을 받았으나 주전확보에 실패하며 대구로 이적. 대구에서도 교체멤버로 활약하다 2007년 방출되었다. 

Posted by 공차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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