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공격력으로 아시아를 정벌.

1997년 말레시아 세계대회에서 참패를 당한 뒤 결성된 1979년생을 주축으로 한 청소년 대표팀이 결성된다. 이동국(29.미들스브로)이 A팀에 선발된 상황에서도 김은중(29.서울), 설기현(29.풀럼), 서기복(29.인천)등 쟁쟁한 선수들이 맹활약하여 U-19 아시아 선수권대회 본선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고, 98 프랑스 월드컵에도 출전한 이동국이 청소년대표팀에 합류하면서 역대 최강의 공격진이란 평가를 받게 된다.

 

아시아 선수권대회 본선에서도 불안한 수비력을 막강 공격으로 극복하였고, 예선에서 만난 일본을 이동국, 김은중의 득점으로 2:1승리를 거두며 조 1위를 차지하며 우즈베키스탄과 준결승을 치르게 된다. 무난한 승리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 되었으나 수비진의 잇단 난조로 인해 승부차기까지 가능 상황에 이르렀고, 골키퍼 김용대의 눈부신 선방으로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

 

결승전의 상대는 예선에서 2:1로 격파한 일본. 다시 만난 일본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김은중의 선취 득점으로 먼저 앞서 나갔으나, 일본의 역습에 한국 수비진이 무너지며 실점. 1:1상황으로 후반을 맞이한다. 이동국은 후반에 교체되어 필드를 누비기 시작하였고, 환상적인 터닝슛으로 득점을 기록하며 2:1승리를 기록. 한국은 2회연속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동국은 대회 득점왕을 기록한다. 이동국, 김은중, 정용훈등 프로 3인방의 활약과 골키퍼 김용대(29.광주)의 활약으로 우승을 차지한 한국은 곧바로 다음해에 있을 세계대회를 준비하게 된다.


정보력 부재와 감독의 전술미스로 다시 한 번 좌절.

아시아 챔피언으로 세계대회를 준비하던 한국은 아시아 대회 우승으로 이끈 박창선 감독을 해임하고, 조영증 감독을 선임하게 된다. 조영증 감독은 아시아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정용훈을 엔트리에서 제외하고, 많은 유망주들은 테스트 하며 최종 엔트리 18명을 선발하기에 이르렀다. 합숙 훈련과 올림픽 대표팀과의 평가전에 좋은 기량을 펼치기 시작하였고, 기존 아시아 선수권 멤버 외에도 97 말레이시아 세계대회에 참가했던 서기복과 광양제철고를 졸업하고 전남에 입단한 미드필더 김경일, 81년생으로는 유일하게 선발된 청구고 에이스 신동근(27.광주)까지 선발하면서 한층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게 된다.

 

이번엔 반드시 4강에 진출할 거라며 언론에서는 다시 4강 신화를 재현할 것으로 예상하였고, 조편성 또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강호들은 피해 포르투갈 - 우르과이 - 말리와 한 조를 이루게 되어 예선 통과를 낙관적으로 평가하였다. 예선 통과 후 대진운만 더 따른다면 다시 4강진출을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 하였다.


1차전 VS포르투갈

89, 91 U-20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91년 세계대회 당시 남북 단일팀을 0:1로 격파했던 포르투갈, 한동안 월드컵 출전을 하지 못했지만 청소년대회에서 강세를 보이던 포르투갈과 1차전을 치르게 됐다. 남북 단일팀이 패한 경우가 있지만 언론에서는 이번만큼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거라 장담 하였고, 국민들의 기대도 그 어느때보다 컸다.

 

한국은 초반에 승부수를 두고 부터 맹공을 퍼부었지만 전반 28분 소사에게 실점하며 위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오버페이스라고 생각할 정도로 많이 뛴 한국이었기에 그 실점은 더욱 뼈 아픈 상황이었다. 그 후 한국은 계속 맹공을 퍼부었고, 전반 37분 대표팀 주장 김건형의 득점으로 1:1 무승부 상황으로 전반을 마칠 수 있었다.

 

후반들어 체력이 떨어진 한국은 포르투갈에게 밀리기 시작하였고, 계속되는 포르투갈의 공격을 김용대가 선방하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바르셀로나 소속이었던 시망 사브로사와 촉망받는 미드필더였던 휴고 레알이 한 골을 만들어내며 역전을 시킨 상황이었고, 한국 청소년 대표팀 선수들은 쥐가 날 정도로 체력이 바닥 난 상황이라 추격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수비수 박동혁의 파울로 페널티킥을 허용하고 말았다. 후반 41분 시망이 페널티킥으로 다시 득점을 올렸고, 한국은 추가득점에 실패하며 1:3으로 패하고 말았다. 무리하게 초반에 승부수를 띄우다 결국 패하며 첫 승을 다음 우르과이 와의 경기로 미뤄야 했다.


2차전 VS 우루과이

포르투갈에게 1:3으로 패한 한국은 다음 상대인 우루과이를 반드시 꺾어야만 했다. 언론의 예상과 다르게 조 최약체로 평가됐던 말리는 우르과이를 격파한 상황이어서, (포르투갈 또한 말리에게 일격을 당한다.) 우르과이를 격파해야 16강 진출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루과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대회 최우수 GK로 선발된 카리니를 비롯해, 주포 체반톤, 포를란이 활약한 우루과이는 한국보다 우세한 전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경기 시작 후 한국팀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수비 불안이 노출되었고, 수비수들의 실수로 인해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체반톤에게 득점을 허용하고 만다. 그 후 이동국, 김은중 투톱과 중앙미드필더 김경일, 서기복을 앞세워 포르투갈을 몰아 붙였으나 우루과이 GK 파비앙 카리니의 눈부신 선방으로 인해 득점을 올리지 못했고, 결국 0:1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국은 2패를 기록하게 되었고, 말리와의 경기에서 대량 득점을 기록하고, 포르투갈-우루과이 경기 결과를 지켜 보는 수 밖에 없었다.


3차전 VS 말리

대회 최 약체로 평가받던 말리의 전력은 예상외로 강했다. 축구강호 포르투갈과 우르과이를 격파하고 2승을 기록해 16강 진출을 확정 지은 상황이었고,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1.5진급 선수를 투입하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한국-말리의 경기 시작전 포르투갈-우루과이의 경기가 먼저 진행되었고, 두 팀은 90분간 공돌리기를 하며 무승부를 기록. 한국은 말리와의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16강 탈락을 하고 만다. 그래도 1승을 올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선수들의 열망은 강했고, 설기현 2골, 이동국, 나희근의 득점으로 말리를 4:2로 격파하고, 1승 2패로 조 최하위를 기록하고 만다.



한국과는 다르게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에게만 2패를 기록한 일본은 조1위로 예선을 통과하고, 포루투갈, 멕시코, 우르과이를 격파하며 대회 결승까지 진출 준우승을 기록하였고, 한국축구는 그 후 큰 충격에 휩싸이고 만다. 1999 나이지리아 청소년 대표 세대들은 그 후 97청대가 주축을 이룬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 일부가 합류하였고, 이동국, 설기현, 김용대, 김은중, 송종국등 비교적 성공적인 선수생활하며, 현재까지 A팀에서도 입지를 다지고 있다. 이 외에도 당시 엔트리에 잠시 이름을 올렸던 이정수, 이상일등도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거나 K리그에서 오랜기간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주요 선수들.


김용대(29.광주) - 거제고 시절부터 주목받던 GK김용대는 청소년대표 시절에도 두각을 나타내며 주전GK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U-20 대표팀에서 맹활약한 김용대는 U-23 올림픽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고교 2년 선배 정유석(31.부산), 김태진, 최현(30.제주)등을 제고 주전 GK로 올림픽에서도 맹활약하며 차세대 GK로 각광받게 된다. 2000년 일본과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고, 눈부신 선방으로 이운재(35.수원), 김병지(38.서울)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한다.

 

연세대 졸업 후 자유계약으로 계약금 3억원에 부산에 입단하게 되었고, 프로로서도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2001년 히딩크 감독이 한국대표팀을 맡은 이후에도 꾸준히 대표팀에 선발 되었지만 최종 엔트리에서 최은성(37.대전)에 밀리게 되면서 2002년 월드컵 당시 선수들의 모습을 TV로 바라봐야만 했다. 그 후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면서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후배 김영광(25.울산)의 눈부신 성장으로 인해 대표팀 차세대 GK 자리도 내주고 만다.

 

성남으로 이적 후 K리그에서 맹활약하던 김용대는 아드보카트 감독에 눈에 들었고, 2006독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합류하게 된다. 대표팀 주전 GK이운재의 맹활약으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4년후를 기약하게 된다. 대표팀에서는 후보였지만 K리그 성남에서는 주전 GK로서 우승을 맛보기도 하였고, 현재 군에 입대에 광주 상무의 골문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한동진(29.제주) - 김용대의 백업으로 대표팀에 합류했던 끝내 김용대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백업멤버로 만족해야만했다. 상지대 졸업 후 부천에 입단하였고, 2003년 주전GK를 확보하는 듯 하였으나 현재 조준호, 최현에 밀려 팀 내에서도 제 3의 GK로 밀린 상태.


이범직(29.천안) - 대표팀에서 수비를 맡던 이범직은 그 후 프로로 진출해 부천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였지만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현재 K3리그 천안시청팀에서 플레잉 코치로 활약중이다.


박동혁(29.울산) - U-20 대표팀의 핵심선수로 평가받던 박동혁은 그 후 U-23팀에서도 주전 수비수 자리를 꿰차며 올림픽본선까지 참가하게 된다. 그 후 독일의 FC 쾰른에서 관심을 갖는 등 촉망받는 기대주로 성장하게 된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독일행과 K리그 진출로 고심하던 박동혁은 계약금 3억원에 전북 현대에 입단하기에 이른다. 그 후 최진철과 함께 전북 수비진을 이끌었지만 대표팀에서는 기존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며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2006년 울산으로 이적 하게 되었고, 현재 울산의 주장으로서 성공적인 프로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잦은 실책성 플레이로 인해 대표팀과는 인연이 멀어진 상태.


송종국(29.수원) - U-20출전 당시 주전 오른쪽 수비수였으나 이동국, 김은중, 김용대, 설기현같은 선수들로 인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세계대회가 끝나고 연세대에서 묵묵히 활약하던 송종국은 2000시드니 올림픽 멤버로 선발되었고, 당시 학연으로 선발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칠레와의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보였고, 2001년 1순위로 부산에 입단. 당시 A팀 감독이었던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어 대표팀에도 합류하게 된다. 두바이 4개국 대회에서 U.A.E와의 경기에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득점을 올리며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고, 2002년 월드컵까지 부동의 오른쪽 풀백으로 자리를 잡는다.

 

월드컵이 끝나고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이적한 송종국은 네덜란드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성공적인 유럽생활을 이뤄나가는 듯 하였지만 계속된 부상과 감독과의 불화로 유럽생활을 정리하고 수원으로 이적하게 된다. 그 후 기량이 쇠퇴했다는 평가속에서도 2006년 월드컵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려 활약하였지만 2002년 만큼의 기량이 나오지 않는건 사실이다.


전재호(29.인천) - 송종국과 함께 좌우 측면을 맡았던 전재호. 하지만 2년 선배 이영표. 2년 후배 신동근의 활약으로 그 후 대표팀과의 인연은 없는 듯 했다. 홍익대를 졸업하고, 성남에 입단해 프로생활을 시작한 전재호는 체격은 작지만 빠르고, 저돌적인 수비로 프로에서 무난한 활약을 펼쳤고, 2004년 창단한 인천으로 이적. 지금까지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고 있으며 2004년에는 코엘류감독의 부름을 받고 A팀에 합류하기도 했다.


신동근(27.광주) - 79년생이 주축을 이룬 당시 대표팀에서 81년생 신동근의 최종 엔트리 합류는 파격적이었다. 당시 조영증 감독은 박용호, 조병국, 김해출등 81년생 선수들을 테스트 하였고, 유일하게 신동근만이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세계대회 1,2차전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3차전 말리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해 좋은 활약을 펼쳤고, 그 후 촉망받는 선수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연세대 재학시절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어 대표팀에서도 잠시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고, 2003년 리그 최강팀 성남 일화에 입단하기에 이른다. 이영표와 송종국을 위협할 차세대 주자로 평가를 받았지만 성남 입단 이후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전재호, 박진섭, 장학영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2007년 군 입대를 결심하고 현재 광주상무에서 활약중이다.


김건형(29.은퇴) - U-20 대표팀의 주장으로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1차전 포르투갈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는등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경희대 졸업 후 드래프트에서 울산에 지명받아 프로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주전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하였고, 2003년 대구로 이적. 재기의 기회를 노렸지만 끝내 부상의 악령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2004년 스물 다섯 어린 나이에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서기복(29.은퇴) - 97 U-20 대표팀 시절부터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 쿠칭쇼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세계대회에 임했지만 1승2패로 또다시 예선탈락하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청소년 대표팀 해산 후 올림픽 대표팀에도 잠시 이름을 올렸지만 같은 포지션의 고종수, 이관우에 밀리며 자리를 잡지 못한다. 연세대 졸업 후 프로가 아닌 상무행을 선택. 군 제대 후 전북에 입단하게 된다.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주목 받는 유망주로 전북에 입단하여 즉시 전력감으로 평가됐으나 전북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한 시즌만에 인천으로 이적하게 된다. 인천에서도 백업 미드필더로 뛰다 2008년 은퇴를 결심하고 현재 인천 U-12 감독재직중이다.


김경일(28.은퇴) - 광양제철고 시절 김해출과 함께 고교무대를 평정하고, 청소년 대표팀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고교 졸업 후 연고 구단인 전남에 입단하게 되었고, 그 해 4월에 열린 세계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윤정환, 고종수를 발굴한 기영옥 감독의 발굴로 기대를 모았으나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전남에서는 경기장보다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결국 전남에서 방출되어 대구로 이적했으나 대구에서도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방출당하고 만다. 그 후 내셔널리그 서산으로 팀을 옮겨 실업축구선수로 활약하였으나 서산에서도 방출 결국 은퇴에 이르게 된다.


이동국(29.미들스브로) - 포철공고시절부터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곽광받기 시작했다. 1996년 2살 많은 선배들 틈에서 청소년대표로 활약했으나 세계대회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하고 2년 후를 기약하게 된다. 고교 최대어로 명문대학과 연고구단 포항의 러브콜이 끊이질 않았고, 고민끝에 1998년 포항에 입단하게 된다. 포항 입단 후 월드컵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역대 월드컵 최연소 대표로 프랑스 대표팀에 합류하게 된다.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는 후반 서정원과 교체 출전하여 두 차례 위협적인 슈팅을 기록하기도 하였고, 그 후 한국축구의 희망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곧바로 청소년 대표팀에 합류해 아시아청소년대회에서 대회 우승과 득점왕을 기록하며 세계대회를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정작 세계대회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 예선탈락이 확정된 상태에서 치른 말리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게 된다. 청소년대표팀 해산 후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하였고, 올림픽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로 맹활약하게 된다. 올림픽 대표팀 뿐만 아니라 A팀에도 이름을 올렸고, 아시안컵에서는 득점왕을 차지하며 유럽구단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고,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브레멘에 임대 선수로 입단하게 된다. 하지만 부상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6개월간의 유럽생활을 정리하게 되었고, 그 후 슬럼프를 겪으면서 2002월드컵 최종 엔트리 탈락하게 된다.

 

그 후 4년간의 준비 끝에 다시 월드컵 무대에 도전을 하였지만 또다시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 엔트리에 합류하지 못하게 된다. 6개월이 넘는 재활기간을 거친 이동국은 다시 유럽무대 도전을 선언하였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미들스브로에 입단하게 된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벤치멤버로 굳혀진 상태. 현재 국내 복귀와 타리그 이적을 고려하고 있다.


김은중(29.서울) - 고교시절부터 네티즌으로부터 천재 스트라이커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동북고 중퇴 후 대전에 입단하면서 당시엔 전무한 고교중퇴 프로선수가 됐다. 아시아청소년대회 예선 당시 이동국이 빠진 상황에서 실질적인 에이스로 활약하였고, 아시아 본선에서 이동국과 역대 최강의 투톱이라는 평가속에 최고의 활약을 펼치게 된다. 대전에서 무난한 활약을 펼쳐 나갔고, 올림픽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3-4-3 에서는 원톱 이동국이 버티고 있었고, 3-5-2를 사용할 당시 최철우, 신병호등과 경쟁을 하였지만 이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본선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한다.

 

그 후 A팀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지만 메이저 대회와는 인연이 없었다. 대전시티즌에서 주축선수로 활약을 하다 J리그 베갈타 센다이에서 잠시 뛰게 되었고, 대전으로 돌아온 후 갑작스럽게 서울로 이적 현재 활약중이다.


설기현(29.풀럼) - 청소년 대표 시절 이동국, 김은중이라는 당시 최고의 투톱으로 인해 최전방 공격수가 아닌 측면 미드필더로 활약하게 된다. U-20 세계대회 말리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그 후 대표팀에서도 윙포워드로 활약하며 올림픽 최종예선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올림픽 본선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했고, 광운대 졸업 후 축협의 유럽진출 프로젝트 추진으로 벨기에 로얄 앤트워프에서 활약하게 된다.

 

첫 시즌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벨기에 구단의 러브콜을 받기 시작하였고, 리그 최강 안데레흐트로 이적하게 된다. 안데레흐트 이적 후 한국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는등 성공적인 유럽생활을 이어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안데레흐트에서 주전경쟁에서 밀리면서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위기를 맞는 듯 했다.

 

대표팀에서는 왼쪽 윙포워드로 주전을 확보하며 2002 월드컵에 참가하여 4강에 오르는데 공을 세운다. 그 후 잉글랜드리그에 진출. 울버햄튼과 레딩을 거쳐 현재 풀럼에서 활약중이다.


나희근(29.-) - 동북고 시절부터 김은중과 함께 최강 투톱을 이뤘던 나희근. 아주대 진학 후에도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U-20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이동국, 김은중, 설기현등 최강의 공격진을 구성한 대표팀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으며 실력을 인정받았고, 세계대회에서는 말리와의 경기에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아주대 졸업 후 드래프트에서 포항의 지명을 받았으나 주전확보에 실패하며 대구로 이적. 대구에서도 교체멤버로 활약하다 2007년 방출되었다. 

Posted by 공차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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