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이동국
생년월일 : 1979년 4월 29일
신장 : 185cm 체중 : 80kg
포지션 : FW
출신교 및 클럽 : 포철공고 - 포항 - 베르더 브레멘
(GER) - 포항 - 상무 - 포항
10대 반란 그 화려한 시작.
포철공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동국은 서울에서 개최되는 U-19 아시아 선수권대회에 대표선수로 선발된다. 2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대회로 2살 아래의 이동국이 선발됐다는 자체로 주목받기 충분했다. 이관우(27.대전), 양현정(28.대구)등 공격진의 틈 속에서 출장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지만 벤치에서 그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세계대회 최종 엔트리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2년 후를 기약해야만 했다.
고교 3학년이 되자. 고교무대를 평정. 더 이상 고교무대에 이동국의 적수가 없었다. 많은 대학에서 스카웃제의가 들어왔고, 연고구단인 포항에서도 해외 축구유학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계속된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대학과 프로를 놓고 고심 끝에 당시 황선홍이 활약하던 포항구단을 선택. 당시로선 이른 나이에 프로생활을 시작한다.(지금이야 고교 졸업 후 프로행을 선택하는 선수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고교-대학-프로’ 형태가 거의 보편적이었다.)
98년 포항에 입단한 이동국은 아주대를 졸업하고 부산에 입단한 안정환(29.뒤스부르크), 프로 3년차 고종수(27.-)과 함께 프로축구를 인기스포츠로 끌어올렸고 황선홍과 짝을 이뤄 아시안클럽챔피언쉽에서 우승. 포항의 2연패를 이끌었다.
차범근 감독의 선택 98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 발탁.
97년. 고교도 졸업하지 않은 한 소년이 월드컵 상비군에 발탁되었다. 포철공고 3학년 이동국.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리며 조금씩 유명세를 타더니 K리그에서도 맹활약하며 98년 4월 예비엔트리 발탁. 그해 5월 자메이카전에 후반 79분 투입되면서 자신의 첫 A매치를 기록하게된다. 평가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이동국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
과연 최종엔트리에 포함될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차범근 감독은 과감히 이동국을 최종엔트리에 포함시킨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17살의 호나우두(29.R.마드리드)가 그랬듯이 한국축구의 미래라 불리던 어린 이동국에게 경기에는 출전하진 않아도 월드컵의 경험을 얻게 하는 것도 훗날 한국팀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발탁한 것이다.
또다시 예선탈락. 그러나 희망을 보다.
프랑스에 도착한 월드컵 대표팀은 1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 사활을 건다. 황선홍이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자 차범근감독은 황선홍, 최용수(33.FC서울) 투톱의 3-5-2대신 김도훈(34.성남)을 원톱으로 하는 3-6-1로 멕시코전을 치른다. 양팀 모두 조심스러운 경기운영을 펼치던 중 하석주가 프리킥으로 월드컵 출전사상 최초로 선제골을 뽑아내며 승리를 확신하는 듯 했다. 그러나 아드레날린이 과한 탓이었을까? 골을 기록했던 하석주는 곧바로 백태클로 퇴장명령을 받고 그라운드를 떠난다. 그 후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내리 세 골을 허용하면서 1:3으로 패. 다음경기인 네덜란드와의 경기에 총력을 기울어야만 했다.
최용수-김도훈 투톱의 3-5-2로 네덜란드를 맞은 한국팀은 계속된 실점으로 0:3으로 벌어지고 차범근 감독은 결국 후반 33분. 이동국을 서정원(36.SV 리트)과 교체시키며 이동국에게 월드컵에서 뛸 기회를 줬다. 교체되자마자 강력한 중거리슛과 헤딩슛으로 네덜란드 수비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이동국의 대인마크를 지시했다. 팀은 결국 0:5로 패하고 말았고, 한국팀은 예선 2패로 탈락이 확정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동국의 15분간의 활약에 희망을 보았고, 다음 월드컵의 대 활약을 예고하는 듯 했다.
K리그의 부흥, 개인최고의 해 1998년.
많은 사람들이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참패로 한국축구의 암흑기를 예상했지만 대표팀 선수들이 소속팀에 복귀하고, 이동국, 안정환, 고종수등 신세대 스타들의 활약으로 K리그는 예상외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된다. 98시즌 K리그는 사상최초 200만 관중을 돌파하는등 리그출범이후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리그 중반 펼쳐진 올스타게임에서도 2골 1도움으로 선배들을 제치고 올스타 MVP차지했으며, 그해 10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치러진 U-19대회에서 우승과 대회 득점왕을 차지하며 환상적인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K리그 우승까지 노려봤으나 포항이 울산에게 덜미를 잡히며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이동국은 안정환과 치열한 경쟁 끝에 신인왕을 차지. 98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그러나 계속된 혹사.
K리그가 끝나고 그 해 12월. 방콕으로 날아가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이동국은 99년 1월 호주 전지훈련과, 던힐컵 참가 후 99년 4월 나이지리아 U-20 대회에 참가한다. 계속된 강행군으로 정상 컨디션이 아닌 상황에서 세계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당시 조 편성은 포르투갈, 우르과이, 말리. 당시 언론에서는 역대최강의 전력에 최상의 조편성이라며 4강도 가능하다고 난리법석이었으나 1승2패로 예선 탈락하고 만다.(당시 조예선 최약체라고 평가하던 말리는 그 대회 4강까지 진출한다.)
나이지리아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이동국은 곧바로 올림픽 1차예선에 참가한다. 1차 예선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는등 맹활약 후 곧바로 K리그에 투입된다. K리그 중반 다시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해 일본과의 평가전을 가진후 올림픽 최종예선에 투입되는 강행군이 계속됐다. 중국, 바레인과 한조에 편성된 한국은 신병호(29.경남)의 골로 중국에서 첫승을 거둔뒤 승승장구 3승1무로 최종예선을 통과하게 된다.
올림픽이 개최되는 2000년. 1월에 올림픽 대표팀은 호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호주 4개국 초청 대회에 참가 후 곧바로 A팀에 합류해 미국으로 향한다. 골드컵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서 황선홍의 패스를 받아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선제골을 터트리며 A매치 첫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팀은 2:2로 무승부를 기록. 결국 2000년 골드컵 우승팀이었던 캐나다와 골,득실까지 동률이 되자. 추첨으로 8강 진출팀을 가리게 됐고, 한국은 아쉽게 탈락하고 만다.
올림픽 최종예선 - 호주 - 미국등 쉴새없이 경기에 투입되다보니 이미 몸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 결국 몸에 이상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릎부상을 안고 계속 경기에 투입된 상태라 부상 정도가 심각해 올림픽 엔트리에 포함되는것조차 힘든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올림픽 대표팀 스트라이커는 ‘이동국’ 이라며 결국 최종엔트리에 부상중인 이동국을 포함시킨다.
올림픽 본선에서 만난 상대는 당시 시드니 올림픽 2,3위를 차지한 스페인과 칠레, 그리고 아프리카의 복병 모로코와 한조에 편성됐다. 1차전 애들레이드서 스페인과의 경기 경기내내 무기력한 플레이를 펼친 한국팀은 스페인에게 0:3의 완패를 당하고 만다. 남은 두 경기를 모두 이겨야 8강진출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
예선 2차전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 3차전 칠레와의 경기에서 8강 진출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칠레가 스페인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혼전상태.
한국은 당시 칠레에게 대량득점을 얻어야만 8강진출을 바라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최철우(29.부천)의 슛이 수비수 몸을 맞고 나오자 이동국이 이 공을 낚아채 골대 구석에 멋지게 찔러 넣으며 1: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지루한 경기끝에 더 이상의 득점은 나오지 않았고, 1:0의 승리로 2승1패로 역대 올림픽 출전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지만 예선 탈락하고 만다.
올림픽이 끝나고 제대로 된 휴식한번 취하지 못하던 이동국은 아픈 무릎을 이끌고 레바논으로 향한다. 아시아 최고의 팀을 가리는 아시안컵 엔트리에 또다시 이동국을 포함 시킨것. 붕대로 칭칭 감은 무릎으로 6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지만 경기가 끝난 후면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로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이동국이 득점왕을 차지하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한국팀은 3위를 기록. 또다시 대회 우승을 차지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무리한 유럽진출 시도 . 그리고 계속되는 부상.
아시안컵이 끝나고 독일로 재활을 떠난 이동국에 대한 소문이 국내에 떠돌기 시작했다. 분데스리가의 명문팀들과 잉글랜드, 이탈리아의 클럽에서 이동국을 영입을 원한다는것. 아시아 최고의 골잡이를 영입하겠다는 팀이 나서자 에이전트는 정상적인 몸상태도 아닌 이동국을 영입하려는 팀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적극적인 구단은 독일 분데스리가의 베르더 브레멘. 재활을 위해 독일에 도착한 이동국을 눈여겨본 베르더 브레멘은 이동국 영입에 나섰고, 6개월간 임대 후 이적조건을 포항에게 제시했다. 축구협회의 끈질긴 설득과 이동국의 해외진출을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포항의 약속을 지킴으로서 이동국의 유럽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결국 7경기 출전이라는 초라한 기록을 남기고 시즌을 마치고 말았다. 하지만 브레멘측은 이동국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며 임대계약 연장을 원했다. 하지만 포항구단은 이를 거부하며 그의 첫 유럽생활은 이렇다할 기록을 남기지 못하며 끝나고 말았다.
초라하게 국내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대표팀에서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히딩크 감독은 계속해 이동국을 소집명단에 포함시켜 테스트 했다. 아직 다 낳지 않은 상황에서 히딩크가 원하는 강인한 체력을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2002 월드컵 엔트리 탈락. 생에 첫 좌절.
월드컵의 해 2002년. K리그 휴식을 마치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던 선수들에게 다시 대표팀 소집된다. 북중미 골드컵에 참가를 포함한 미국 전지훈련. 계속된 좋지않은 평가를 받던 이동국은 자신이 A매치 첫골을 넣었던 미국땅에서 다시한번 부활하리라 다짐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대표팀이 경기내내 무기력한 플레이를 펼치고 있었고, 이동국 또한 결정적인 득점찬스를 몇 번 놓치는등 부진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골드컵에서 4위로 마친 대표팀은 곧바로 우르과이로 향한다. 우르과이와 A매치에 출장한 이동국은 미국 전지훈련과 별반 다를게 없는 플레이를 펼치자 언론에서 엔트리 탈락 명단에 이동국을 넣기 시작한다.
결국 부상으로 히딩크가 원하는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하며 최종 엔트리에서 이동국의 이름은 빠지고 만다. 4년전 19살의 어린 나이에 무너져 가던 한국축구에 한줄기 희망이 되어주던 그의 엔트리 탈락은 본인 뿐만 아니라 그를 응원하던 팬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대표팀이 승승장구하며 4강에 진출할때까지 눈물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아시안게임 동메달. 그리고 군입대.
월드컵이 끝나고 축구협회는 박항서 감독을 아시안 게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고 U-23 대표팀을 구성한다. 박항서 감독은 부상에서 회복됐다는 판단아래 이동국을 선발.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로 기용한다. 처음으로 대표팀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던 이동국은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고, 다른 선수들도 당시 금메달을 획득하면 군 면제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어느때보다 선수들의 의지는 대단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만난 이란과의 경기에서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펼쳐 나갔지만 골 운이 따르지 않아 0:0 무승부를 기록하였고, 승부차기에서 이영표(29. 토튼햄)의 실축으로 결국 패하며 동메달을 획득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아시안 게임이 끝나고, 이동국은 변화가 필요하단 생각에 군입대를 결심하게 된다. 군 입대를 결정하게 된 후 인터넷에서는 안티들의 활동이 더 활기를 치기 시작했다.(‘X동국 당신의 군입대를 축하합니다.’라는 플랜카드를 경기장에서 펼친 사진이 돌기도 했다.)
2003년 3월 상무에 입단한 이동국은 몸 상태가 완전치 않은 상황이었고, 히딩크 감독의 후임으로 선임되었던 움베르토 코엘류 대표팀 감독의 부름을 받았지만 자신의 장점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만다. 하지만 상무에 입대하게 된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는지, 그동안 팬들 사이에서 안뛴다던 평가를 받던 그의 플레이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폭 넓은 움직임을 바탕으로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 주는 능력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광주 상무의 주전스트라이커로서 K리그에서 맹활약 하기 시작했다.
다시 떠오른 본프레레의 황태자.
대표팀의 계속된 졸전으로 코엘류 감독이 해임되었고, 그의 후임으로 네덜란드 출신 본프레레 감독이 선임된다. 한국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대표팀 선발에 착수 했고, 한동안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던 이동국도 대표팀 명단에 포함된다.
대표팀에 다시 선발되어 참가한 아시안컵. 4년전 아시안컵에 참가해 팀은 3위를 기록했지만 이동국은 대회 득점왕에 오르며 유럽진출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대회였다. 이동국은 이 대회에서 다시 부활해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를 원했다. 매 경기 골을 기록하며 다시 팀을 우승으로 이끌것으로 예상했으나 8강에서 만난 이란과의 경기에서 3:4로 패하며 대회 우승과 득점왕을 모두 놓치고 만다. 하지만 아시안컵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리며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이동국 이라는 인식을 다시 새겨 놓았다.
아시안컵이 끝나고 본격적인 월드컵 예선준비체제로 들어간 대표팀은 2차 예선에서 고전하며 힘들게 최종예선에 진출하게 된다. 한국은 최종예선에서 사우디, 쿠웨이트, 우즈베키스탄과 한 조에 편성되었고, 무난한 조편성이라는 평가속에 예선통과는 낙관적이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독일 대표팀이 아시안 투어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해 대표팀과 평가전을 가지게 되었다. 1:1상황으로 진행되던 상황에서 이동국은 멋진 터닝 발리슛을 하였고, 세계최고 골키퍼로 불리던 올리버 칸(36. 바이에른 뮌헨)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골을 터트리며 최종예선에 대활약을 예고했다.
2005년 2월 쿠웨이트와의 최종예선 1차전.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이끌어 나가던 대표팀은 이동국의 호쾌한 발리슛으로 다시 득점을 올리면서 승기를 잡았고, 후반 이영표(29. 토틑햄)의 추가골로 2:0승리를 거뒀다. 그 후 사우디에게 2패를 기록하긴 했으나 최종전적 3승1무2패로 조2위로 독일행 티켓을 거머쥐게 된다.
본프레레 경질. 흔들리는 위상?
월드컵 예선동안 사우디에게 패하는등 조금씩 흔들리던 대표팀은 2005년 8월 홈에서 치러진 동아시아컵에서 중국과 북한에게 무승부를 기록하였고, 마지막 경기였던 일본에게 0:1로 패하면서 최하위를 기록하게 된다. 무엇보다 가장 문제되었던건 경기내용도 엉망이었지만 선수에 대한 테스트가 거의 없었고, 경기내내 단조로운 전술로 일관하면서 팬들의 질타를 받기 시작했다.
결국 본프레레 감독은 중도하차하게 되었고, 새로운 네덜란드 출신 감독인 딕 아드보카트를 U.A.E에서 대려온다. 아드보카드 감독이 부임하면서 모든 상황은 원점으로 되돌아갔고, 주전 스트라이커로서 입지를 굳건히 지키던 이동국은 다시한번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아드보카트 감독 부임 후 첫 평가전이었던 이란과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에서 이동국만한 스트라이커를 아직 못봤다고 할 정도로 조금씩 아드보카드 감독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의 경기에 골을 기록하며 자신을 계속 기용해준 신임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두차례의 평가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아드보카트감독으로부터 ‘한국에서 이동국보다 훌륭한 스트라이커를 못봤다’ 라는 호평속에 2006년 1월 전지훈련 멤버로 발탁. 평가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2006 독일월드컵 주전스트라이커 자리를 예약했다.
또다시 월드컵 발목을 잡는 부상.
2006 K리그가 개막되고, 4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는등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던 이동국. 너무 몸이 가벼웠던 탓이었을까? 포항에서 벌어진 인천과의 경기에서 그만 무릎부상을 당하고 만다. 무릎부상 후 2~3주면 완치가 가능하고, 한달 후 경기에 뛸 수 있을거란 낙관론이 언론으로부터 흘러 나왔지만 이동국의 부상상태는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시 의료진은 수술을 권유했고, 약물치료로라도 월드컵에 참가하겠다는 이동국의 의지는 강했다. 결국 주변의 만료끝에 세계최고의 재활치료 시스템을 갖춘 독일에서 최종 진단을 받기로 결심한다.
당시 이동국이 뛸 수 있는 확률은 10%.
독일에 도착한 이동국은 곧바로 검사에 들어갔고, 독일의 의료진은 월드컵 출전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8년을 기다린 월드컵을 눈 앞에서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한편 대표팀은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동국 없는 대표팀으로 바꿔야만 했다. 핌 베어백 수석코치는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조재진(25.시미즈)의 플레이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다른 이동국의 대체카드를 찾는데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동국 없이 대표팀을 구성된 대표팀은 독일로 향했고, 1차전 토고와의 경기에서 승리하고, 프랑스와 무승부를 거두는등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인해 0:2로 패하면서 16강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8년을 기다린 월드컵. 하지만 2010년 월드컵이 있어 행복하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그라운드를 누비고 싶어하던 이동국은 결국 관중석에서 바라봐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있어 그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리는 4년 후 라이온 킹의 땅 아프리카에서 포효하는 라이온 킹 이동국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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